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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자 Oct 15. 2021

세대별 PVP 게임의 세 가지 평등주의적 변화

이전편 링크본입니다.


https://brunch.co.kr/@netee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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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별 PVP 게임의 변화


왼쪽부터 <스트리트 파이터 2>(1991), <스타크래프트>(1998), <리그 오브 레전드>(2009) 1, 2, 3세대를 대표하는 게임들이다.


PVP 게임에서 추구하는 능력주의/평등주의적 가치는 세대별로 달라졌다. 필자는 PVP 게임이 3세대에 걸쳐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1세대는 아직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 9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오락실 아케이드 격투 게임의 시대다. 2세대는 <퀘이크>와 <스타크래프트> 이후 90년 대 후반부터 <리그 오브 레전드>가 발매되기 직전인 2009년까지의 PVP 게임이다. 3세대는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필두로 하여 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유행하기 시작한 배틀로얄, 오토배틀러 게임까지다. 이 세대별 구분법은 필자 개인의 자의적 구분이며 엄밀한 학술적 구분은 아니다. 추가로 오버워치 같은 게임은 FPS 게임이지만, 3세대에 나온 게임이고 2세대와 3세대의 특징을 혼합한 경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세대별로 구분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PVP 게임을 세대별로 구분하는 이유가 있다. 1->2세대처럼 플랫폼의 변화도 있지만, 그것보다 세대별로 게임의 규칙이나 유행하는 PVP 게임의 장르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점에서 구분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3세대에 걸쳐 PVP 게임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해보겠다.


1991년, PVP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2>(이하 스파 2)는 PVP 게임 대중화의 서막을 올렸다. 이전에도 <스트리트 파이터>를 비롯하여 플레이어와 경쟁한다는 개념의 게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유명해진 게임은 분명 스파 2가 최초였다. 이 게임으로 인해 아케이드 시장은 패러다임이 변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아도~겐! 어~류~겐! 라데꾸! 아따따뚜겐!" 등 게임 속 캐릭터의 대사를 따라했으며, 그건 그대로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게임을 상징하는 밈이 되어 2021년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후 <철권>,<킹 오브 파이터즈>, <사무라이 스피리츠>, <버추어 파이터>, <길티기어> 등 여러 명작 격투 게임들이 등장했고 90년대 오락실 아케이드 시장의 르네상스가 열렸다.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던 대전 격투 게임은 2000년대가 오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오락실 게임기에는 다음 판을 기다리는 동전들이 수북히 쌓여있었으며 한판 한판이 빠르게 회전되는 격투게임의 특성상 오락실 입장에서도 얻는 수입이 적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은 한 판 한 판 이길 때마다 환호하기도 했고, 분노하여 ‘샷건’을 쳤으며, 지고 나서 너무나 화가 난 일부 플레이어는 상대방에게 직접 다가가 현실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30대 이상의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즉, 오락실 격투 게임은 플레이어 간 대전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게임 내러티브였던 것이다.


2세대 PVP 세대의 첫 발을 내딛은 게임은 이드 소프트웨어의 <퀘이크> 시리즈다. <퀘이크 2>(1997)이후로 각종 FPS 커뮤니티가 활성화됐고, 프로게이머라는 용어도 최초로 만들어졌다. 다만 전 세계에 E-스포츠를 알리고 본격적으로 PVP 게임의 활성화를 주도한 게임은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1998)(이하 스타크래프트)라고 할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의 ‘BoxeR’ 임요환, <퀘이크>를 비롯한 여타 고전 FPS 게임의 황제였던 'Fatal1ty' 조나단 웬델, 그에 비견하는 프로게이머인 'F0rest' 패트릭 린드버그 등 여러 네임드급 프로게이머들이 나왔고 지금도 이들의 명성은 여전하다.


E-스포츠는 본격적으로 PVP 게임의 전성기를 이끌며 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내러티브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에 성공했다. 임요환 vs 홍진호의 ‘3연벙’ 사건을 비롯하여 절대적인 포스를 내뿜던 ‘본좌’라인과 이들을 극복하며 새로운 시대를 연 다수의 프로게이머들 등 너무나 많은 이벤트와 영웅들이 있었고 이에 감명받은 플레이어들이 삼삼오오 PC방에 모여 스타크래프트를 즐겼다. 2000년대에 한국은 주로 스타크래프트를 필두로 하여 나름 또 다른 국민 게임 취급을 받던 포트리스 2 등이 유행했고, 외국은 주로 퀘이크와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비롯한 FPS 게임이 새로운 게임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2009년에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고 2010년부터 첫 번째 시즌을 맞이한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는 기존 PVP게임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3세대에 등극한 작품이다. 롤은 기본적인 뿌리는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의 유즈맵인 Aeon of Strife의 형식을 물려받았지만, 처음에는 유즈맵이었던 게임이 <워크래프트 3>의 도타에 오면서 장르적 형식을 정립하기 시작했고 롤에 이르렀다. 롤은 E-스포츠계에서 10년 이상 군림하던 스타의 자리를 꿰차고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PVP 게임 전반에 여러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존에 인기 있었던 게임 장르들은 다수가 몰락의 길을 걷거나 살아남은 게임들조차도 게임 규칙에서 세부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 떠오른 장르의 종류로는 롤과 도타 2로 대표되는 AOS(MOBA) 장르를 필두로 하여 배틀로얄, TCG, 오토배틀러 등이 있다. PVP 게임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해본다면 1세대 -> 2세대 -> 3세대로 오면서 세대별로 나름대로 특징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세대별 게임 연표


PVP게임이 1 -> 2 -> 3세대로 나아가면서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 순수한 실력 게임에서 운의 요소가 개입되는 방식으로 게임의 형식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가장 실력 비중이 높은 순수한 실력 게임은 단연 1세대 게임인 대전 격투 게임이다. 격투 게임 장르는 운의 요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반드시 1:1 형식을 강요한다는 점이 그렇고, 조작의 난이도도 높은 데다 각종 딜레이캐치를 비롯하여 수많은 테크닉을 학습해야 한다는 점에서 거대한 진입장벽을 갖고 있다. 추가로 게임을 시작하면 상대방 플레이어의 모든 정보가 공개된다. 상대 플레이어가 무슨 기술을 쓰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위 ‘꼼수’를 쓸 여지조차 없다. 상대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눈에 뻔히 보이는데, 일정 수준 이상 실력 차이가 나는 고수라면 당연히 보면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수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1세대 대전 격투 게임에서는 극상성이 아닌 이상 하수가 고수를 이기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2세대에서는 이 현상이 조금 완화된다. 스타크래프트처럼 여전히 1:1 위주로 게임이 운영되는 경우가 많지만, 스타도 그렇고 다른 PVP 게임들 다수가 3:3, 4:4 등 다대다 대전이 가능해지면서 개인이 조금 게임을 못하더라도 ‘팀빨’을 받아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로 상대방 정보의 비공개다. 스타의 경우 볼 수 있는 시야가 플레이어 본인이 소유한 유닛과 건물이 갖고 있는 시야에 한해서만 전장의 정보를 볼 수 있다. 정찰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 플레이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수많은 변수 플레이가 가능하다. 12드론 앞마당을 펴고 빠른 확장을 선택한 저그라면 4드론이나 5드론 저글링 플레이를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빌드가 극단적으로 갈려버리면 상당히 수준 차이가 많이 나는 고수라도 하수를 이기기가 매우 어렵다. 게다가 4인용 맵처럼 상대 스타팅 위치가 여러 개인 경우에는 첫 시작 시에 일일이 다 정찰을 가야 하는데, 12드론 앞마당을 선택한 고수가 운이 없어서 상대방의 스타팅 포인트를 맨 마지막 정찰에 눈치챈다면, 이미 상대방의 저글링은 뽑혀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각1) <퀘이크>나 <카운터 스트라이크>같은 FPS도 1:1을 넘어 다대다 대전이 가능한 데다가 상대방 정보의 비공개로 인해 하수가 방심한 고수를 저격 한 방으로 이길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하는 식이다.


3세대로 오면서 운의 비중은 더욱 올라간다. 우선 배틀로얄이 운의 요소가 심하다. 스팀 동접자 수 4위에 달하는 <배틀그라운드>를 사례로 들어보자. 스타팅 포인트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플레이 구역 등이 전부 무작위적으로 나타난다. 처음 게임을 시작하여 비행기를 타고 에란겔 지역의 밀리터리 베이스에 떨어졌는데, 플레이 구역 제한이 북쪽 끝 부분인 스탈베르 지역에 걸려버린다면, 웬만큼 게임을 잘하는 플레이어라도 플레이 구역까지 이동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먼 상황이다. 좁아지는 플레이 구역까지 가는 도중에 기다리고 있던 상대방에게 저격을 당하거나, 운이 없으면 플레이 구역까지 도달하지도 못하고 게임에서 패배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게임을 시작한 지점에서 아이템을 먹기도 전에 먼저 좋은 아이템을 선취한 상대방에게 허무하게 죽어나가기도 한다. 이만큼 운의 요소가 지대한 게임이 배틀로얄 장르다. 하스스톤과 같은 TCG는 더 심하다. 첫 턴을 시작하여 플레이어의 마나 수정이 1밖에 없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카드 교체까지 해서 손에 잡힌 카드들이 6코, 7코 이런 카드만 잡힌다면 상대방 역시 운이 없어서 비슷한 카드들만 손에 잡힌다든지, 아니면 고코스트 카드 위주로 덱을 구성한 빅덱이 아니라면 상대방을 이기기가 매우 힘들다. 예시로 상대방이 돌진 사냥꾼 덱처럼 극단적으로 빠른 템포의 덱을 채용한 플레이어라면 그 판은 이길 수 없다고 보는 게 편할 정도다. 덕분에 아무리 프로게이머라도 일반 플레이어에게 얼마든지 질 수 있는 게임이 하스스톤이다. 오토체스와 같은 오토배틀러도 운의 요소가 지대하다. 원하는 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매 턴이 시작될 때마다 랜덤하게 주어지는 유닛들 중에서 원하는 유닛이 빠르게 나와야 하는데, 이 유닛이 나오는 확률 또한 완전히 랜덤이기 때문에 원하는 유닛이 늦게 나올수록 덱 구성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십중팔구 게임에서 진다. 덱을 꾸리고 유닛을 배치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전투를 벌인다는 오토배틀러 장르의 특성상 콘트롤로 극복할 수 있는 게임 내 요소도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3세대 게임 중에서 운의 비중이 가장 적다고 할 수 있는 게임이 AOS(MOBA) 장르의 게임이다. 크리쳐들의 등장 시간은 정해져 있고, 운에 따라 좋은 아이템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 많은 미니언과 챔피언 등을 잡아내어 더 많은 골드를 수급한 사람이 좋은 아이템을 얻게 되고 게임 내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세부적으로 운의 영역을 줄이고 실력을 더 중요시하는 식으로 게임의 방향이 바뀌어 가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크리티컬 확률 룬이 삭제되는 등 확률에 의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각종 타겟팅 기술들이 논타겟팅으로 바뀌면서 스킬을 맞추기 위해서는 기존보다 더 많은 실력이 필요해졌다. 가령 판테온 Q가 타겟팅에서 논타겟팅으로 바뀌면서 상대방에게 Q를 맞추기가 어려워진 게 좋은 예시다. 대신 Q가 날아가는 방향의 모든 적에게 데미지를 주는 식으로 리턴이 늘어남으로써 리스크와 리턴을 둘 다 늘려 플레이어의 콘트롤 여하에 따라 더 좋은 성능을 낼 수 있도록 바뀌었다. 운보다 명백히 실력 위주로 게임의 방향이 변화하고 있다는 모범적 사례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AOS(MOBA) 장르가 순수한 실력 위주의 게임인지는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실상 게임 내에서 5:5 팀플레이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스타처럼 다대다 멀티를 허용하되 사실상 1:1을 권장하는 게임과는 결이 다르다. 5:5 게임에서 팀원이라는 변수는 플레이어 개인의 통제가 불가능한 순수 '운'의 영역이다. 이로 인해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팀운을 비판하지만, 5:5 게임이라는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팀 게임의 한계는 명확하다. 전 프로게이머 출신인 클라우드 템플러 선수와 전상욱 선수 모두 "롤 첼린저는 다이아 티어에서 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스타는 마음만 먹으면 첼린저가 다이아한테 질 수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추가로 FPS 게임이기는 하지만 시대상 3세대에 속하는 오버워치 역시도 6:6에 탱/딜/힐 포지션을 강요하는 팀 게임이라는 점에서 운의 요소가 많이 작용하는 편이다. 이런 식으로 1 -> 2 -> 3세대에 걸쳐 순수한 실력 위주의 게임보다는 운과 실력이 결합한 형태로 PVP 게임들은 변화하였다.


게임 내 운의 요소가 강화된다는 건 능력주의보다는 평등주의에 가깝다. 과거의 실력 위주 게임 같은 경우 단순히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스타를 처음 하는 플레이어든, 10년 이상 오랫동안 게임을 해온 고인물 플레이어든 테란을 고를 수 있고 벌쳐와 시즈탱크를 생산할 수 있는 규칙은 동일하게 적용되듯이 말이다. 규칙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황에서 순수하게 실력을 겨뤘고 더 잘하는 사람이 거의 100% 승리했다. 대전 격투 게임 같은 경우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있기에 그만큼 변수도 적다. 캐릭터 간 상성이 극심하여 기회의 평등 자체가 어긋난 경우가 아니면, 상대방보다 조작을 더 정확히 할 줄 알고, 각 상황마다 어떻게 대처할지를 암기하고 있으며,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 상대방보다 뛰어난 쪽이 대부분 이긴다. 세대가 지나면서 승패를 가르는 데 운의 요소가 개입되고, 그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다소 실력이 떨어지는 플레이어도 고수 플레이어를 이길 수 있게 게임의 구조가 변했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마저 추구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세대별로 비교했을 때나, 플레이어 사이 간 승패의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나 명백한 평등주의적 변화다.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로> 요괴 쿠사레게도(왼) vs 마지키나 미나(오). 쿠사레게도는 미나의 원거리 공격에 대처할 수단이 전무하다.

두 번째는 게임의 규칙이 1 -> 2 -> 3세대로 오면서 변화가 심해진다는 점이다. 1세대 오락실 대전 격투 게임에서는 밸런스 패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오락실 아케이드에서 게임을 하다 보니 온라인으로 게임의 밸런스를 수정한다는 행위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임의 신작이 나오지 않는 한 처음 나온 게임의 버전 그대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게임 내의 극단적인 상성 매치도 자주 이루어졌다. 흔히 예시로 들기 쉬운 극단적인 상성이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로>의 요괴 쿠사레게도 vs 마지키나 미나 매치다. 미나 측에서 멀리 떨어져서 화살만 잘 쏴도 쿠사레게도의 거대한 몸집과 느린 기동력 때문에 미나에게 접근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다수의 격투 게임 플레이어에게 9:1 이상의 상성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 정도면 그냥 게임을 잘못 만든 수준이다. 밸런스 패치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시절이다.


2세대로 오면서 밸런스 패치가 가능해졌다. 밸런스 패치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첫 번째는 게임의 규칙을 변화하여 특정 캐릭터나 종족을 약화시키거나 강화시킨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게임의 규칙을 바꿈으로써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도구의 숙련도를 낮춘다는 점이다. 특정 캐릭터나 종족을 약화시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순기능은, 이제 쿠사레게도 vs 미나처럼 극단적인 상성 게임을 보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처음 게임이 극단적인 상성을 지니고 있어도 바로 밸런스 패치를 해버리면 없던 게 된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상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밸런스 패치가 숙련도를 낮추는 기능에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모두를 추구할 수 있다는 순기능이 있다. 기존 규칙에 적응한 플레이어는 규칙이 변경되어 다시 규칙에 적응하고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다시 충분히 게임을 플레이해야 한다. 덕분에 게임을 이제 막 시작하는 신규 플레이어에게 조금이나마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돌아간다. 기존 플레이어가 규칙에 적응하는 사이에 신규 플레이어도 같이 게임을 하면서 새로 바뀐 규칙에'만' 같이 적응을 하면 되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했던 플레이어 간 숙련도의 격차가 줄어든다는 얘기다. 기존 플레이어와 신규 플레이어 사이에 출발선을 조정하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다.


밸런스 패치 전->후 간 숙련도 변화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가령 위에 예시로 들었던 쿠사레게도 vs 미나가 극단적인 상성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쿠사레게도 측에서 미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밸런스 패치를 통해 게임의 규칙을 변경하여 쿠사레게도에게 상대방의 공격을 1회 무시하고 일정 거리 이상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돌진기를 준다고 가정해보자.각2) 무적 돌진기가 생김으로써 쿠사레게도는 미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다. 명백하게 캐릭터가 강해진 상태다. 여기서 미나는 아무런 변경점이 없지만, 쿠사레게도에게 무적 돌진기라는 하나의 규칙이 추가됨으로써 기존 게임에서 플레이하던 대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게 된다. 쿠사레게도에게 돌진기가 없었던 기존 규칙대로 게임을 플레이하면 쿠사레게도의 돌진기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미나 측에서는 쿠사레게도의 돌진기에 대응하기 위해, 즉 변화한 게임의 규칙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전략을 구상해야만 한다. 미나 측은 기존에 갖고 있는 승리 플랜을 갈고 닦을 이유가 사라지며 이는 곧 기존 플레이어의 숙련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쿠사레게도의 돌진기를 실전에서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대처법을 안다고 해서 바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처법을 실전에서 수행하기 위해 충분한 연습이 필요하다. 돌진기에 제대로 반응하기 위해서 그만큼 미나라는 게임의 도구와 새로 바뀐 규칙에 대한 숙련도를 추가로 쌓아야 한다는 의미다. 기존 플레이어가 바뀐 도구와 규칙에 적응하는 사이에 새롭게 게임을 시작한 신규 플레이어는 처음부터 바뀐 도구와 규칙에만 적응하면 되기 때문에 게임을 시작하여 기존 규칙에 대한 숙련도가 0이더라도 상대적으로 숙련도의 격차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출발선이 좁혀질 수 있다. 이처럼 밸런스 패치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캐릭터 상성의 불합리함을 줄여줌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출발선 조정이라는 결과의 평등마저 추구할 수 있다는 순기능이 있다.


시즌제 적용 전->후 숙련도 변화


3세대의 시즌제는 2세대의 밸런스 패치와 동일한 논리로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으며 효과가 밸런스 패치보다 더 극단적이다. 롤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되면 밸런스 패치는 물론이거니와 소환사의 협곡에 있는 레벨의 기믹도 바뀌고,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의 목록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며, 룬과 특성이 통합되는 경우마저 있다. 2010년의 롤과 2021년의 롤은 매년마다 시즌제를 반복한 탓에 완전히 다른 게임에 가까울 정도가 됐다. 밸런스 패치 하나만으로도 플레이어의 숙련도를 어느 정도 낮추는 효과가 있는데, 아이템, 룬과 특성, 레벨의 기믹까지 전부 바뀌니 그만큼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더욱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여러 번 시즌이 바뀌자 게임에 적응하지 못해 승률이 낮아지고, 그로 인해 게임을 그만 두게 되는 기존 플레이어들이 속출한다는 것은, 시즌제가 기존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도구 및 규칙에 대한 숙련도를 낮춘다는 근거가 된다.각3)



<리그 오브 레전드>의 추천 아이템

세 번째 특징으로는 세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초보자를 도와주는 게임의 시스템이 늘어나면서 게임의 진입장벽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추세라는 사실이다. 1세대 오락실 대전 격투 게임의 시대에는 튜토리얼 같은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상대방 CPU와 1:1로 경쟁해야 했으며 중간에 다른 플레이어가 동전을 넣고 컨티뉴를 하면 초보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도 이전 시대라 초보자가 실력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그저 게임을 많이 해보고 스스로 복기하면서 게임 플레이 실력을 늘리는 방법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2세대에 들어오면서 게임 내에서도 게임의 규칙을 설명해주는 튜토리얼이 생겨났고, 게임의 메뉴얼이 주어졌다. 메뉴얼을 읽고 튜토리얼을 거치고 나면 적어도 처음 게임을 시작한 초보자가 게임의 규칙을 몰라서 당하는 일은 없게 됐다. 3세대에서는 메뉴얼이 사라진 대신 게임이 더욱 친절해졌다. 튜토리얼에서부터 3단계에 걸쳐 라인전, 아이템 구매 등 게임의 모든 기본 규칙을 알려주고, 무슨 아이템을 구입해야 하는지 상점에서 추천 아이템 목록도 나온다. 추천 아이템의 선정 기준은 해당 캐릭터로 플레이 했을 시에 고수들이 어떤 아이템을 주로 사용하는지를 통계로 삼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아이템을 추천 아이템으로 선정하는 식이다. 특히 고수들의 통계를 바탕으로 삼아 추천 아이템을 알려준다는 것은 평등주의에 가깝다. 아이템 선정 역시도 오랜 시간 게임을 플레이한 고수들의 노하우이자 게임 플레이 팁이다. 게임 내에 어떤 아이템이 더 유용한지를 아는 것 자체도 기존 플레이어와 초보 플레이어 사이의 격차가 된다. 추천 아이템을 선정함으로써 초보자라면 롤에 존재하는 어떤 아이템을 구입해야 효율적인지 공부할 필요가 줄어들었으며, 그만큼 아이템 구입으로 인한 플레이어 사이의 격차가 줄어드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각4) 이러한 튜토리얼의 친절함 덕분에 전 프로게이머 출신인 클라우드 템플러 선수와 전상욱 선수 모두 롤이 스타크래프트보다는 진입장벽이 낮은 게임이라고 방송에서 입을 모았을 정도다.


게임 내 운의 요소 강화, 밸런스 패치 및 시즌제의 도입, 튜토리얼로 인한 초보자 진입장벽 낮추기는 순수한 능력주의자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임의 변화다.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거나, 플레이어들이 정말로 순수한 능력주의자 집단이라면 이런 급진적인 게임의 변화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특히 롤의 시즌제 같은 경우 게임의 규칙이 매우 급진적으로 변하면서 기존 플레이어가 쌓아온 노하우라든지 게임 플레이 팁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각5) 현실로 비유하자면, 기존 고인물 플레이어는 현실의 기득권에 해당하고 초보 플레이어는 가난한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득권은 누가 물려줘서 얻은 것도 아닌 순수하게 자신이 노력하여(수없이 게임을 플레이하여) 얻은 '자수성가'의 표본이다. 시즌제는 자신이 지금까지 노력하여 일궈놓은 자산(게임 플레이 팁이나 노하우, 즉 게임 내 도구와 규칙의 숙련도)을 가난한 사람(초보자)과 출발선을 맞추겠답시고 빼앗아버리는 행위에 가깝다. 능력주의자가 이런 급진적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튜토리얼 강화, 추천 아이템 선정 같은 시스템도 그렇다. 플레이어가 직접 노력해서 얻은 노하우를 초보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냥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능력주의자가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무엇보다 게임 내 운의 요소를 더하는 행위는 플레이어 집단이 능력주의자라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될 천인공노할 행위다. 정말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면 3세대에 유행한 수많은 게임들 중 운의 요소가 강한 게임들(배틀로얄, TCG, 오토배틀러 등)은 진작 망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비록 게임 커뮤니티에서 '운빨x망겜'이라는 욕을 먹을지언정, <배틀그라운드>는 여전히 스팀 동접자 수 4위에 달할 정도로 흥행하고 있고 <하스스톤>은 무려 블리자드의 소년가장 소리를 듣는다. 플레이어를 순수한 능력주의 집단이라고 매도하기는 어려운 이유이며, 나름대로 평등주의적 성격을 가진 게임 규칙의 변화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3부에서 계속

(참고문헌은 하나의 챕터가 끝난 후 한꺼번에 첨부합니다)


각1) 물론 프로게이머 정도 되면 일꾼 컨트롤 만으로도 하수의 저글링 러시를 막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예외에 속한다.


각2) 밸런스 패치때 캐릭터의 신기술을 추가해주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그런 사례가 있다. <스트리트 파이터 5> 장기에프의 툰드라 스톰 기술이 추가된 케이스가 그렇다.


각3) 역기능도 있다. 우선 밸런스 패치 및 시즌제가 의도와는 다르게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모두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밸런스 패치 및 시즌제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항상 의도대로 적용되는 건 아니다. 밸런스 패치 및 시즌제가 적용된 이후에는 플레이어 또한 변화한 규칙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뀐 규칙에 맞춰서 충분한 숙련도를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련도를 쌓을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고 또다시 밸런스 패치를 해버린다면 플레이어는 갑작스러운 게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신규 플레이어에게 정보가 과도하게 주어진 경우도 이처럼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밸런스 패치와 시즌제를 하는 게 아니라 급작스럽게 여러 번 밸런스 패치와 시즌제를 거쳐 변화한 게임의 규칙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경우에 가깝다. 밸런스 패치와 시즌제 자체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적절한 시기에 밸런스 패치와 시즌제를 하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밸런스 패치와 시즌제를 단행한 부작용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각4) 100개가 넘는 챔피언으로 인한 롤의 방대한 학습량, 끊임없이 변화하는 게임의 규칙으로 인해 스타보다 롤의 진입장벽이 더 높다는 의견도 있다. 롤은 학습해야 할 요소 자체가 많다면, 스타는 학습량은 적어도 실전에서 활용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롤의 진입장벽이 높은지, 스타의 진입장벽이 높은지는 해석의 차이이므로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각5) 물론 받아들이지 않는 플레이어도 많다. 실제 여러 커뮤니티에서 비판받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즌제는 계속 진행이 되고 있으며 10 시즌이 넘게 이러한 시즌의 변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은 불만은 있을지언정 플레이어들 다수가 받아들이지 않는 요소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정말 다수의 플레이어가 시즌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접었을 것이고 게임사 측에서도 시즌제를 운영하지 않는 방향으로 게임의 운영 방식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플레이어들 역시도 받아들이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편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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