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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자 Oct 23. 2021

게임의 창작자가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 조립의 재료

<라스트 오브 어스 2>를 둘러싼 PC 논쟁


디지털 세계의 전쟁터였다. 근 수년간 게임계를 둘러싼 PC(political correctness : 정치적 올바름) 갈등을 표현할 단어는 그것 말고는 없었다. 그 갈등의 화룡점정을 찍은 작품이 작년 너티독에서 발매한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이하 라오어 2)였다. 작년 게임계는 이 게임으로 인해 양극단으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벌였다. 라오어 2를 비판하는 쪽은 게임 내 PC요소와 개연성 없는 스토리, 플레이와 내러티브 사이의 충돌 등을 지적했다. 이 게임에 높은 점수를 부여한 평론가에게 무차별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이른바 평론가 무용론, GOTY(Game Of The Year, 한 해에 가장 뛰어났던 게임을 지칭하는 용어로, 게임웹진마다 한 표씩 투표를 하며, 가장 많은 웹진의 GOTY에 선정된 게임을 최다 GOTY라고 부른다) 무용론을 벌이기도 했다. 라스트 오브 어스 2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비판하는 사람들이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타 문화예술에서도 나타나는 PC 혐오의 일환으로 취급했다. 첫 번째로 PC를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게임의 질이 떨어졌다는 측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실 게임계는 이전부터 PC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편이었다. 성'소수'자라는 말대로 작품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소수에 그치기는 하지만, 서양 게임 중에서는 꽤 많은 작품에서 성소수자가 등장하곤 했던 것도 사실이다. 90년대로 넘어가 보자. 1990년 오리진 시스템즈의 명작 RPG <울티마 6: 거짓 선지자>에는 매춘을 하는 집시들이 등장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남녀 모두와 동침할 수 있다. 1998년에 발매된 <폴아웃 2>에서는 좀 더 나아간 PC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게임에서 주인공은 NPC '다빈'과 '미리아'를 상대로 성별 무관하게 혼인 서약이 가능했다. 이후 2000년대에도 <심즈>, <페이블>, <더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 블러드라인> 등이 이성애/동성애/양성애 모두를 게임 내에서 허용하도록 해줬다. <엘더스크롤 3 : 모로윈드>의 트랜스젠더 비벡 같은 캐릭터도 있다. 이처럼 게임과 PC는 나름대로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만, 2000년대까지는 LGBT 캐릭터에 특별한 서사를 부여하기보다는 '놀이의 자유'로서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준 정도에 그쳤다.각1)


출처는 게임메카 - 동성애자인 베로니카(왼)와 그녀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크리스틴(오)

2010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LGBT가 게임계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폴아웃 뉴베가스의 베로니카 산탄젤로는 게임 내 PC 요소를 어떻게 녹여내야 할지 그 바람직한 기준을 제시한 캐릭터라고 부를 만하다. 동성애자인 그녀는 여성의 몸으로 철권을 휘두르는 격투가이며, 벙커에 주둔한 동료들을 위해 손수 외부 정보와 물자를 구해오는 주체적인 여성이자, 한 때 사랑했지만 '어떠한 이유'로 홀연히 떠나버린 한 여인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레즈비언이다. '어떠한 이유'는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나 게임 속 대화 내용으로 추정컨데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이라는 같은 조직에 있었던 크리스틴 로이스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조직의 수장이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 고의적으로 둘을 갈라놓았다는 설정이다. 이외에도 폴아웃 뉴베가스의 주인공 동료들은 시니컬한 게이 의사 '아케이드 개넌', 양성애자 카우걸 '로즈 오브 샤론 캐시디' 등 LGBTQ 요소를 담은 캐릭터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며 게임 내 슈퍼뮤턴트와 인간의 갈등은 현실 인종차별의 오마주다. 이처럼 게임 내에 PC요소를 노골적으로 넣어놨음에도 폴아웃 뉴베가스는 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전 세계 게이머들에게 명작으로 인정받았다.


출처는 게임메카 -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의 마법사 도리안 파부스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실제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을 묘사해낸 게임도 있다. 2014년 GOTY에 빛나는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이하 인퀴지션)이 그것이다. 전작 드래곤 에이지 2에서 연애 가능한 모든 캐릭터가 양성애자 설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제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을 깊이 있게 묘사해낸 캐릭터는 없었기에 작위적인 느낌에 그쳤다면, 인퀴지션은 동성애가 가능한 캐릭터의 비율을 줄인 대신에 더 치밀한 배경 설정과 스토리를 추가하여 선택과 집중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물론 여전히 이성애자 : 동성 내지 양성애자의 비율은 4:4로, 현실적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한 부분이 있다).


특히 인퀴지션의 캐릭터 중에서도 도리안 파부스(이하 도리안)는 게임 속 동성애자 캐릭터 중 백미라고 말할 수 있다. 고귀한 혈통을 지닌 귀족이었으나 동성애자였던 그는 귀족의 여식과 정략결혼시키려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이성애자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려 하던 찰나 도리안에게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도리안은 결국 가족과 집안을 버리고 여행길에 떠났다는 설정이다. 도리안 캐릭터를 만들어낸 작가인 데이비드 게이더는 실제로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였다. 그가 동성애자로서 가장 괴로웠던 점은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차별과 혐오가 아니라 평생을 의지했던 가족의 멸시였다고 한다. 작가 본인이 도리안이라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과정은 내내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게임 속 캐릭터를 통해 실제 동성애자가 겪는 고통과 차별을 표현한 인퀴지션은 평론가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드래곤 에이지의 팬들 중에서 PC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만큼 불만이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이외에도 10대 소녀들의 사랑을 담은 <라이프 오브 스트레인지> 등 PC와 게임 간의 관계가 배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주장하는 '게임에 PC 요소가 들어가서 망했다'는 주장은 반박의 여지가 크다. 오히려 게임 쪽은 전반적으로 PC에 대해 다소 유연한 편이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PC를 넣는다는 이유만으로 라오어 2를 비판하는 건 플레이어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질 뿐이다.


PC를 둘러싼 개연성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게임에 PC를 욱여넣기 위해 기존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조엘을 아무런 개연성 없이 죽였다는 주장이다. 게임 초반부에 조엘이 죽을 때, 정체 모를 집단에 아무런 의심 없이 찾아가서 잡히고 나서는 허무하게 골프채로 얼굴이 날아간다. 전작에서 좀비보다도 사람을 경계하고, 사람을 제일 무섭다고 엘리에게 신신당부하던 조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이외에도 동성 간 연애를 부각하기 위해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평화로운 신혼집을 마련해두는 등 PC요소를 끼워넣기 위해 전작에서 구축해놓았던 세계관과 캐릭터를 전부 무너뜨렸기 때문에 비판받는다는 주장이다.


<콜 오브 듀티:어드밴스드 워페어>의 메인 빌런 조나단 아이언스. 왜 세계에 전쟁을 걸어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지 작중 내에서 개연성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PC 때문에 개연성이 무너지고 내러티브 전달이 어설퍼졌다는 주장은 해당 작품만 따졌을 때는 어느 정도 수긍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고정된 내러티브의 개연성에 대해 집착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사실 고정된 내러티브 자체가 엉망인 작품들은 수없이 많다. <콜 오브 듀티:모던 워페어>를 사례로 든다면, 본 작의 끝판왕급 인물인 러시아의 바르코프 장군은 매우 설득력이 떨어지는 인물이다. 전쟁 범죄, 백색 테러를 저지르는 악당인 것은 알겠지만 왜 악행을 저지르는지,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봐야 타국의 인물인데 왜 우리가 직접 특수부대원까지 동원해서 바르코프를 죽여야 하는지 작중 설명이 매우 부족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콜 오브 듀티:어드밴스드 워페어>는 한술 더 뜬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멍 투성이다. 테러리스트를 소탕하여 명성을 얻고 전 세계에 통할만큼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조나단 아이언스가 왜 세계에 전쟁을 걸어야 하는지부터 시작하여 게임 내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요소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 역시도 컷신 위주에 영화 같은 연출을 장점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개연성에는 별 말이 나오지 않으면서도 라오어 2의 개연성 부족에만 집중한다는 건, 그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라오어 2의 PC와 개연성 논란이 얼마나 부실한 주장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끝났다. 라오어 2 문제를 더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다른 논란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중요한 논란이 있다.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논란이다.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란 게임 내에 존재하는 고정된 내러티브와 게임 플레이가 충돌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2007년, 루카스아츠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클린트 호킹이 바이오쇼크를 해당 문제로 비판하며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플레이 상에서는 플레이어가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게 되지만 고정된 내러티브 상에서는 플레이어에게 이타주의를 의도하여 서로 충돌한다. 이처럼 '플레이-내러티브' 사이의 상충 현상을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라고 부른다.


라오어 2를 향한 비판점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만한 비판점은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현상에서 비롯된다. 게임에서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복수의 허무함,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일갈하면서도 게임 플레이로는 오히려 폭력을 강요하며, 폭력을 행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각2) 실제로 이 게임 속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비명과 피, 온갖 끔찍한 것으로 채워 넣어 폭력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엘리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닐 때 그들은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자비를 부르짖는다. 내러티브 상에선 이 사람들이 엘리가 생각하는 만큼 나쁜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동기도 엘리만큼이나 복잡하고 타당하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을 죽이지 않으면 게임을 진행할 수가 없게 만든다. 그렇게 내러티브(폭력, 복수의 무의미함) - 플레이(폭력, 복수를 장려)가 충돌한다는 게 라스트 오브 어스 2 비판의 핵심 쟁점이다.


<스펙 옵스 : 더 라인>의 로딩 화면.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주입한다.


유사한 사례로 2012년에 발매된 <스펙 옵스 : 더 라인>이 있다. 이 게임도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낸 게임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이 게임에서 유명한 백린탄 장면이 좋은 예시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박격포로 적군에게 백린탄을 쏘는 장면이 나온다. 플레이어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백린탄을 쏘지 않으면 상대 NPC에게 공격당해 플레이어가 죽는다. 백린탄을 쏘면 직전까지만 해도 플레이어를 죽이려 했던 적군이 왜 그랬냐며 플레이어에게 핀잔을 주는 걸로도 모자라 적들이 돕고 있던 민간인들이 플레이어의 백린탄으로 인해 떼죽음을 당한 장면을 컷신으로 보여준다. 게임 로딩 화면에서는 "이건 모두 당신의 잘못입니다(This is all your fault). 이제 좀 당신이 영웅 같습니까?(Do you feel like a hero yet?)"식으로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주입한다. 플레이에서는 폭력과 살인을 강요하면서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시키는 대로 플레이하면 내러티브 상에서는 욕을 먹는 구조다. 라오어 2와 스펙 옵스 : 더 라인 모두 플레이와 내러티브의 부조화가 일어난다는 점, 게임 디자인 상의 실수가 아니라 다분히 개발자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수의 평론가, 비평가들이 게임에서도 다른 매체와 동일하게 강렬한 메시지의 전달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라오어 2라는 게임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괴로워하고 이 게임을 비난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게임이 효과적인 메시지의 전달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처음부터 플레이어를 불쾌하게 만들기 위해서 게임이 만들어졌고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닐 드럭만의 기획 자체는 성공이다. 게임 내에서 일어난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도 다분히 의도적인 게임 디자인이었을 뿐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게임은 나름대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필자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근원적인 의문이 남는다.


영화 같은 게임과 플레이어-캐릭터 사이의 분리 - 굳이 게임에서조차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가


여기 한 명의 대학생이 있다. 그는 대학 수업을 하나 신청했다. 신청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수업은 토론 위주의 수업이라고 한다. 교수가 지식을 전달하는 부분은 최소화한다. 대신 되도록 많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의 수업이라고 강의계획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강의계획서를 읽은 학생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다른 학생들과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수업을 신청했다. 그런데 막상 수업에 들어가니 수업 내 토론 비중은 쥐꼬리만큼 있고, 수업 내용의 대부분은 교수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의 수업이었다. 수업에 실망한 대학생은 해당 수업의 강의평가를 최하점으로 주었다.


필자는 게임의 메시지 전달 기능이 위 사례와 동일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에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굳이 게임에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가 남는다. 대학생들이 구태여 토론 수업을 듣는 이유는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상대방과 의견을 교환하는 양방향적 상호작용에 있다. 토론이라는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토론 수업을 수강할 이유가 없듯이, 상호작용의 매체인 게임 역시도 상호작용성이 줄어든다면 굳이 게임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는 이미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이미 수많은 명작 소설을 비롯하여 다수의 서적을 접하고, 해당 서적에서 전달하는 메시지에 공감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포스터에서는 해당 포스터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 역시도 다양한 카메라 기법을 동원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능에 능하다.각3) 예술이 힘없는 시민을 대변하거나 사회적 문제를 풍자하는 도구로 사용된 사례는 너무나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게임이 다른 매체보다 메시지 전달에 크게 장점을 갖는 매체도 아니다. 게임 속 대본을 아무리 잘 써봐야 노벨상을 받은 소설의 위대한 영역에 미칠 수 없다. 영화 같은 컷신을 틀어봐야 실제 영화의 비주얼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규칙에 따른 상호작용, 즉 플레이라는 게임 고유의 특징을 훼손하면서까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이유가 당최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출처는 위키 - 워렌 스펙터

전설적인 게임 개발자 워렌 스펙터는 '게임은 주장하는 매체가 아니라 질문하는 매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유는 소설, 영화처럼 관객의 입장에만 서는 일방향적 매체와 달리 게임은 사람이 직접 하면서 내러티브를 만들어간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워렌 스펙터는 이러한 게임의 매체적 특징을 보고 플레이어에게 작가의 권한을 나눠준다는 의미에서 '작가성의 공유(sharing author ship)'라는 표현을 썼다. 워렌 스펙터가 주장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비록 게임 속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의 경험은 온전히 본인의 것이고 플레이어라는 외적 요인이 없다면 게임은 결코 그 자체로 완성될 수 없다. 서론에서 언급한 에스켈리넨의 게임은 해석이 아니라 조형하는 행위라는 주장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게 게임이라는 매체를 다른 매체와 구분 짓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인 양방향성이다. 게임 개발자들이 반드시 게임을 하는 사람의 생각을 존중해줘야만 하는 이유다. 따라서 주장하고 싶은 메시지, 사상이나 이념 등이 있더라도 직접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주어져야 할 뿐, 결코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일방적으로 주입하려 드는 순간 게임은 영화나 소설과 같은 일방향적 매체와 다를 바 없어지기 때문이다.각4) 양방향성, 상호작용이라는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 즉 오리지널리티를 포기하는 셈이다.


워렌 스펙터의 주장은 게임계 PC논란에 대해 명확한 통찰을 준다. 배틀필드 V 사태 당시 EA의 최고 디자인 책임자의 못 배운(Uneducated) 사람 발언, 그리고 2020년의 라스트 오브 어스 2 논란 등 게임계에서 벌어진 PC 논란에서 빠지지 않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 '게임이 가르치려 든다'는 말이다. 가르친다는 말을 바꿔 말하면 플레이어의 의도와 달리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을 일방적으로 전달한다는 뜻이다. '영화 같은 게임'이 게임계의 주류가 되면서 게임은 게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인 양방향성, 상호작용의 요소를 조금씩 포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근거다. 소설, 영화, 그림, 사진 등 여러 문화예술에서 동일하게 추구하는 내러티브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상호작용이라는 게임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을 약화시키고 있는 추세다.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는 일방적인 내러티브 전달을 위해 게임의 상호작용을 포기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일방향적 스토리텔링에 집중한 결과는 플레이어들의 반발이다. 최근 라스트 오브 어스 2를 비롯하여 게임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반발은,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부작용이었다. 지금껏 플레이어들이 반발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민감한 주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이 대중화되면서 게임의 구조와 문법에 친숙하지 않은 대중들을 위해 게임은 영화의 문법을 채택했다. 플레이하는 중간마다 영화와 유사한 컷신이 나왔다. 게임 내 컷신은 나름대로 플레이어에게 휴식의 시간을 제공하기도 하고, 난관을 넘었을 때 나름대로의 보상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컷신이 발생하는 순간에는 플레이어의 상호작용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비판을 많이 받는 기능이다. 게임 내 컷신이 늘어나고, 캐릭터성이 확고해지며 고정된 내러티브 요소가 강화될수록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각5) 인터랙티브 무비의 사용이 과해질수록 게임의 인터랙티브 요소는 줄어들며 심지어는 게임답지 않은 게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는 라우스의 주장을 비롯하여, 크로포드, 풀러와 젠킨스 등 수많은 게임 학자, 디자이너들이 컷신의 남발이 게임 다움의 훼손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게임 중간에 컷신이 없는 게임들도 많다. 벨브의 <하프라이프>, <포탈>, 베데스다의 <엘더스크롤> 시리즈 등이 그렇다. <위어드 웨스트>를 개발하고 있는 게임 내러티브 디자이너 루카스 로레도 역시도 게임 내 컷신의 도입이 플레이어의 자주성을 빼앗아 간다는 이유로 게임 내 컷신이 없는 게임을 만들고 있을 정도다.


물론 게임계의 주류가 '영화 같은 게임'이 되면서 고정된 내러티브라는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게임 커뮤니티에서 '유사 영화 게임'이라는 비판을 받는 <GTA 5>가 1억 5천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GTA 5>의 성공 요인에는 광대한 오픈월드 속 놀이의 자유 구현도 있지만, '유사 영화'에 해당하는 게임 내 컷신을 비롯하여 고정된 내러티브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게임이 영화를 따라 하고, 영화 같은 요소를 집어넣을수록 상호작용의 측면에서는 분명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물론 영화 같은 요소가 다수 플레이어의 취향에 더 맞을지라도, 즉 '재미'있을지라도 그건 다수의 플레이어가 게임보다 영화의 문법에 더 친숙하고 영화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지, 게임 자체의 재미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임 내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요소이기에 무시는 할 수 없을지언정 한계점만큼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컷신은 어디까지나 게임의 재미를 더해주는 향신료 정도의 기능에 그칠 뿐, 컷신 자체가 게임의 필수 요소가 될 수는 없다. '영화 같은 게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게임에 영화적 요소를 넣을수록 게임의 상호작용을 약화시킨다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루돌로지/내러톨로지 논쟁과 창조적 수용


초기 게임학계의 연구 방법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게임의 고정된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내러톨로지, 게임의 규칙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플레이에 중시하는 루돌로지가 그것이다. 전통적인 내러티브 연구와 함께 시작된 내러톨로지 게임 연구는 게임 역시도 하나의 고정된 내러티브 전달 도구로 본다. 기존의 내러티브 텍스트 분석의 도구를 활용해 게임의 메시지 전달 능력에 집중한다. 반면 루돌로지는 이러한 내러톨로지에 반발하며 나타난 학문으로, 게임의 상호작용적 측면과 규칙이 갖는 의미에 집중한다. 내러톨로지 vs 루돌로지는 초기 게임학을 규정짓는 중요한 논쟁이었으며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


위 논쟁의 결과는 크게 3가지 측면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 수년에 걸친 논쟁 끝에 판정승을 거둔 학계는 루돌로지다. 두 번째, 그럼에도 게임의 내러티브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세 번째, 이제 내러톨로지는 제작자가 부여하는 고정된 텍스트 위주의 분석이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수용자, 즉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만들어지는 내러티브에 집중하게 됐다는 것이다.


논쟁의 결과를 좀 더 자세하게 풀어보자. 게임은 참여적 서사다. 올셋에 따르면 참여적 서사라는 말은 독자와 게임 내 텍스트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일종의 피드백 루프를 형성한다. 게임 내 텍스트는 독자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고 독자는 텍스트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입력하는데 이게 상호작용이라는 것이다. 상호작용에 따라 게임은 활성화되며 활성화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이며 물리적인 자극을 준다. 가령 MMORPG에서 스킬의 레벨이 1이고 올릴 수 있는 스킬 포인트를 1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해당 스킬을 누르면 2가 된다. 이처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피드백을 통해 기존의 내러티브 이론에서 '독자'라는 개념은 '플레이어'가 된다. 플레이어는 독자와 달리 어떤 스킬을 올리느냐(파이어볼 1레벨 대신 아이스 볼트 1레벨을 올린다든지), 어떻게 움직이느냐 등 항상 다른 선택에 따라 각자가 다른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게임은 항상 다른 경험을 플레이어에게 가져다준다. 유튜브 동영상으로 공략을 찾아보며 해당 공략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는 한 게임은 결코 선험적이며 객관적이고 모든 플레이어에게 동일하게 전달되는 텍스트가 될 수 없다. 모든 플레이어가 동일한 게임을 플레이하더라도 플레이 하는 과정은 각자가 다르고 갖는 경험도 달라지기 때문에 기존 내러톨로지 이론은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루돌로지쪽에 좀 더 설득력이 생기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처음 루돌로지를 주창했던 곤잘로 프라스카 역시도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의 이원론을 주장했을만큼, 100% 순수한 루돌로지스트나 내러톨로지스트는 존재할 수 없다. 내러톨로지와 루돌로지 모두 게임을 이루는 요소라는 걸 인정하되, 규칙과 상호작용이라는 루돌로지의 측면을 좀 더 중시해야 한다는 정도로 게임이라는 매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정된 내러티브와 텍스트 전달이라는 기존 내러톨로지의 주장이 한계에 부딪히자 새롭게 나타난 대안이 바로 수용자 측면에서의 내러티브, 즉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집중하는 것이다. 게임의 서사 분석은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텍스트 분석보다는 플레이어의 행위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의미에 대한 기술이 되어야 한다고 박근서가 주장하듯이 말이다. 필자의 두 가지 내러티브 역시 박근서의 글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필자의 글은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 두 가지 측면 모두를 고려한 글이며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보는 입장이다.각6) 첫 번째 파트였던 WRPG vs JRPG 논쟁에서부터 자유와 통제를 위해 고안된 게임 디자인을 둘러싸고 일어난 플레이어 간 논쟁들, 확률형 아이템을 둘러싼 논쟁, 게임의 평등주의적 규칙과 게임 내러티브 사이의 충돌 모두는 전부 규칙과 상호작용이라는 루돌로지의 전제를 받아들이면서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집중한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게임 개발자가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는 건 일종의 '레고 블록'같은 조립의 재료일 뿐이다. 레고 블록을 가지고 어떻게 조립할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맡긴다. 게임평론가 이경혁은 이러한 게임과 플레이어 간 관계를 보고 '창조적 수용'이라고 불렀다.


왼쪽 위부터 <디스아너드(2012)>, <할로우 나이트(2017)>, <오브라딘 호의 귀환(2018)>, <셀레스트(2018)>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게임 내에 고정된 내러티브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한계에 부딪혔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정된 내러티브에 대한 과도한 저평가가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렇지 않다. 고정된 내러티브 역시도 조립의 재료로 적절하게 사용된다면 얼마든지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도움이 된다. 일방적으로 내러티브를 전달하여 플레이 자체에 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된다. 이미 플레이어들은 고정된 내러티브를 플레이어가 조립하도록 만들어주는 훌륭한 사례들을 다수 알고 있다. 아케인 스튜디오의 <디스아너드>는 카오스 시스템을 도입하여 플레이어의 행동을 게임에 반영한다. 플레이어가 적을 많이 죽일수록 쥐떼가 늘어나며 사람들이 플레이어를 탓한다. 이 게임에서는 비살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여러 루트를 고안해놓았으며 저혼돈 엔딩을 보고 싶다면 되도록 목표물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고혼돈 엔딩을 보고 싶다면 상대방을 최대한 많이 죽이면 된다. 어떻게 플레이하느냐는 플레이어의 자율에 맡기되, 플레이어의 행동에 명확한 책임을 부여할 뿐이다.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원하는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 게임 내내 상대방을 죽일지, 안 죽일지를 끊임없이 선택하며 게임을 조립해나간다. 팀 체리의 <할로우 나이트>는 고정된 내러티브를 담고 있는 텍스트, 이벤트, 보스, 등장인물, 대화록 등을 게임 곳곳에 흩어놓았으며, 흩어놓은 내러티브를 플레이어가 스스로 조립하며 해석하도록 여지를 남겨놓았다. 게임을 마친 플레이어들이 <할로우 나이트>의 내러티브를 스스로 추론하며 어느 플레이어의 해석이 좀 더 정확한지 커뮤니티에서 토론하는 장면은 명백한 창조적 수용이라 할만하다. 루카스 포프의 <오브라딘 호의 귀환>은 오브라딘 호에 탑승한 60명 전원의 운명을 알아내는 게 목표인 게임으로, 이 게임 역시도 승객과 선원의 운명이라는 고정된 내러티브를 플레이어가 직접 추론하여 알아내는 과정이 조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게임의 기승전결은 철저히 어긋나 있으며 회중시계를 통해 비선형적으로 승객과 선원들을 관찰하고 탐색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은 플레이어마다 다르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매트 메이크스 게임즈의 <셀레스트>는 산을 올라가야 한다는 게임 내 목적을 주면서도 주인공인 마들렌이 왜 산에 올라가야 하는지 동기를 의도적으로 비워놓는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비워놓은 동기를 플레이어 본인의 동기로 채워 넣게 된다. 마들렌이라는 캐릭터를 플레이어 스스로 조립하는 과정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게임들이 있다. 사례로 든 게임들이 완벽한 게임들이라는 게 아니다. 다만 위 게임들은 적어도 플레이어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게임은 아니다. 게임 플레이 과정을 통해서 플레이어 스스로 선택하고 고민할 여지를 남겨준다. 의도적으로 플레이와 내러티브를 충돌시켜 플레이를 훼손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라오어 2 같은 게임보다는 고정된 내러티브를 월등하게 활용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플레이어가 만들어나가는 내러티브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윤태진과 나보라에 따르면 결국 게임은 어디까지나 디자인된 것이고 누군가에게 디자인된 존재라는 것은 그 표피 아래 일관되게 흐르는 절대적인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플레이어에 의해 수정되거나 변형될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정엽 역시도 플레이어가 창조해 나가면서 바뀌는 상호작용적인 서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게임에서 이는 우발적인 스토리에 그치거나 개발자가 만들어놓은 고정된 틀 안의 스토리를 조합, 변형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플레이어가 만들어나가는 내러티브의 한계를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반박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규칙이 플레이어의 행동을 제한하며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을 유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더라도, 플레이어의 역량은 그걸 뛰어넘는 창의적 플레이를 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임요환이 마린으로 럴커를 잡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게 대표적 사례다. 블리자드 입장에서는 마린과 같은 보병들을 카운터 치기 위해 디자인한 저그의 유닛이었으나, 테란의 가장 최약체 보병인 마린한테도 플레이어의 역량에 따라 사냥당한다는 것은 명백히 디자이너의 의도를 벗어난 행위다. 스피드런/스코어링 문화 역시도 마찬가지다. 더 빠른 시간 내에 클리어하기 위해, 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전략을 수정하며 자신의 컨트롤 역량을 키운다. 그 결과 디자이너의 상상을 초월한 슈퍼 플레이가 나오기도 한다.  <포탈>의 스피드런 동영상을 보고 개발자 본인조차 어떻게 이리 플레이할 수 있는지 감탄한 사례가 IGN 공식 유튜브에 올라오는 걸 보면 게임 기저에 규칙이 존재하더라도 플레이어의 창의성을 제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개발자의 디자인 의도조차 뛰어넘는 창의적 플레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의 힘이다.


두 번째로는 위 주장들이 게임 내 존재하는 '난관'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 내에 존재하는 강력한 괴물, 어려운 퍼즐, 복잡한 미로, 다양한 기믹의 함정 등 플레이어는 게임 내에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게임에 존재하는 난관과 끊임없이 충돌한다.각7) 각각의 플레이어는 난관과 충돌하며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은 플레이어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개인마다 실력과 가치관 등 전부 다 다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시행착오를 겪고 극복하는 과정 끝에 각기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정엽이 주장한 대로 큰 틀에서 고정된 내러티브를 조합, 변형하는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실패 지점이 다른 이상 서로의 경험도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한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다크 소울>의 난관을 고작 몇 번의 실패(Game Over) 끝에 게임을 클리어하는 '신컨'과 수백 번의 실패 끝에 클리어하는 일반 플레이어의 경험이 같을 수가 없듯이 말이다. 물론 이건 공략집을 보지 않고 직접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에 한해서다.각8)


세 번째는 해석이 갈릴 수 있다. '모드(MOD)'의 존재다. 게임을 모딩 하는 플레이어, 즉 모더는 단순한 수용자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의 게임이라는 창작용 도구 상자를 제공받은 플레이어는 수용자의 영역을 넘어 창작자의 영역에 도달하기도 한다. 게임 안에 직접 데이터를 수정할 수 있는 에디터를 사용하여, 게임 기저에 존재하는 규칙마저 바꿔버리는 플레이어가 모더들이기 때문이다. 모더들에게 게임 기저에 존재하는 규칙 같은 건 의미가 없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게임의 모딩을 '게임'으로 봐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놀이'로 봐야 하는 것인지는 의견의 차이가 갈릴 수 있다. 앞선 글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놀이가 어떤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움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하는 행위라면, 게임은 일정한 규칙 체계로 제약된다는 차이점이 있다.각9) 규칙 자체를 바꿔버리는 모딩을 '게이밍' 내지는 '플레잉'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비디오) 게임 이전에 내러티브 게임의 시조로 자리 잡은 서구의 TRPG는 테이블 토크 롤플레잉 게임(Table Talk Role Playing Game)의 약자다. 여기서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은 한글로 번역하면 역할 수행 게임이 된다.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플레이어가 직접 캐릭터를 만들거나 기존에 만들어진 캐릭터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여 목표를 달성한다는 말이다. 즉, '플레이어가 직접 만들거나 주어진 캐릭터의 역할을 직접 수행하는 행위'가 TRPG의 본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직접 수행하는 행위'다. 시조부터 게임의 내러티브는 정해진 스토리, 즉 고정된 내러티브를 감상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TRPG에 깊게 영향을 받은 초기 서구의 WRPG들이 문제 해결의 자유를 중시한 이유는 당시 유행하던 어드벤처 게임에 영향을 받았던 점도 있지만, TRPG 자체가 처음부터 고정된 내러티브만을 중시하는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게임조차 처음 나왔을 때부터 고정된 내러티브 자체만을 추구하는 매체가 아니었다. 내러티브 게임의 시조인 TRPG, 최초의 TRPG인 D&D(Dungeons & Dragons)조차 여러 가지 흥미로운 설정과 세계관, 규칙을 마스터와 플레이어에게 던져줬을 뿐이고 그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의 재료, 즉 조립의 원재료일 뿐이었다. 판타지 소설과 TRPG는 명백히 다르다. 또 다른 TRPG 룰북인 <겁스>만 봐도 알 수 있다. 소설이나 시나리오 등 기존 서적에서 볼 수 있는 기존의 내러티브와 게임 내러티브는 내러티브가 발생한 시조부터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었던 것이다. 고정된 내러티브의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의 보완재일 뿐, 대체재가 될 수는 없다. 필자의 글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도 이 둘의 차이를 밝히고 각 내러티브의 역할을 명시하고자 함이다. 두 가지 내러티브의 차이를 인지함으로써, 독자들이 게임이라는 매체에 조금이라도 더 이해력을 높이길 바라면서 이만 글을 줄인다.


각1) 자유와 통제를 위해 고안된 게임 디자인의 변천사 3편을 참고하라.


각2)  엘리가 분노하는 게 당연하며 복수가 정당한 것인데, 그럼에도 복수에 잠식되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시도에 가깝다는 위근우의 해석도 있다. 다만 하나의 해석일 뿐, 주류는 아니기 때문에 따로 각주를 달아 설명한다.


각3) 물론 영화도 메시지 전달이 중요한 매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도 엄밀히 구분한다면 고정된 내러티브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카메라 촬영을 통해 다양한 빛그림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를 해석하는 걸 중심으로 두는 영화가 영화의 본질이라는 주장도 많다. '메시지를 보내고 싶으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라고 주장한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누벨바그 계통 감독들이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각4) 물론 소설이나 영화도 해석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작가와 독자, 감독과 관객 사이의 쌍방향적 소통이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완성되어 있는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에 불과하므로 직접 조형적 행위가 가능한 게임과는 결이 다르다.


각5) 롤플레잉 게임계의 좌우파, WRPG vs JRPG 2편을 참고하라.


각6) 극단적인 내러톨로지스트들은 루돌로지-내러톨로지 논쟁을 무의미하다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나 게임 내에 존재하는 규칙과 상호작용의 측면을 무시하고 여전히 고정된 텍스트 분석과 메시지 전달에만 치중하곤 한다. 게임 내에 엄연히 존재하는 텍스트를 분석하는 행위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규칙과 상호작용, 플레이어의 측면을 배제하고 고정된 텍스트만을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법이다.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유익하지 못한 태도다.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존재를 배제한 채 고정된 내러티브만을 분석하는 행위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은 여러 게임학 논문에서 수없이 지적한 사실이다.


각7)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난관과 충돌한다는 개념은 상대방과 경쟁한다는 개념으로 바꿔볼 수도 있다.


각8) 자유와 통제를 위한 게임 디자인의 변천사 1편과 2편을 참고하라.


각9) 자유와 통제를 위해 고안된 게임 디자인의 변천사 3편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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