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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Feb 06. 2019

기대감의 철학

첨예한 양날의 검, '기대감'

2019년이 된 지 한 달이 넘게 지난 지금, 음력으로 두 번째 새해를 시작하려니 외려 별별 생각이 다 드나 보다. 설 연휴로 인해 맞게 된 아주 길고 잉여로운 시간이 나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 하고 왜 책을 읽고 싶어 하며 왜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가.

왜 매해 다이어트, 책 100권읽기, 영어 공부하기라는 목표를 세우고, 매해 똑같이 실패하며, 그러고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또다시 같은 목표를 세우는 걸까. 


내가 내린 답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질 거라는 기대감,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감. 이런 기대감은 비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끝날지언정, 계속해서 내 안에서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게으름을 괴롭혔다. 삶의 변곡점을 만들었다. 


결국 목표했던 만큼의 몸무게 감량도 못하고, 작가가 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기대감들은 내 삶을 이리 끌고 저리 밀며 조금씩 변화를 줬다.  


하지만 동시에, 요즘 화두가 됐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떠올랐다. 부모 자식 간에 벌어졌던 이 수많은 비극들의 근본적인 원인 역시 '기대감'이라는 확신이 든다. 다만 앞서 말했던 내 삶의 동력으로서의 기대감과는 약간 다른 성격의 기대감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걸었던 기대감은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정당화되는 듯했지만, 결국 파멸로 이어졌다. 


타인을 향하는 높은 '기대감'은 관계를 망친다


사실 나는 누군가와 크게 소리 지르며 싸워본 적이 없다. 연인이든 친구든 나에게 불이익을 주는 모르는 이들에 게든. 불만이 있을지언정 싸우는 것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고 우스운 일처럼 여겨진다. '내가 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사람인지라 상대에게 작은 기대를 하고 그로 인해 서운한 감정이 생기거나 화가 날 수는 있지만, 나는 상대방의 주인도 아니고 상대방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킬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나를 두고 답답해했던 사람들도 있고, 싸워봐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싸움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가 격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상대방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난 정말이지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부모 자식이라는 선천적인 관계 때문에, 혹은 단순한 호의 때문에 연결되어 있는 이 허약하고 연약한 관계에 '기대감'이라는 무거운 의무를 지우는 것이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싸우고 화해하는 프로세스 자체에 뛰어들기 싫어 핑계를 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웬만하면 안 싸우는 것이 더 낫다는 게 내 기본적인 생각이다. 


타인의 기대감과 나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같은 방향을 향할 때는
아,
물론 말이 달라진다. 


가끔은 누군가가 나에게 거는 기대감이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관계에 좋은 윤활유가 될 때도 있다. 나 스스로가 나에게 거는 기대와 타인의 기대가 동일할 때다. 달리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나약한 의지와 완벽한 망각 능력 덕에 목표 달성의 꿈이 느슨해진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타인의 기대는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타인의 기대는 나의 기대 수준보다 낫고, 나를 위하는 마음이 우선이어야 한다. 


거의 십 년 전쯤 본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정형돈과 태연의 빙어축제 장면이 나에겐 아직도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다. 빙어를 잡으러 간 정형돈과 태연 커플이 빙어가 잡히지 않자 정형돈이 포기를 하려 하고, 태연은 그런 그를 보고 너무 힘들면 잡지 않아도 괜찮다고 응원해준다. 그러자 정형돈은 오히려 더 열심히 빙어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중에 인터뷰에서 하는 말이, "만약에 태연이가 빙어 왜 못 잡냐고 소리를 질렀으면 오히려 짜증 나고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 괜찮다는 말 때문에 더 빙어를 잡아주고 싶더라" 란다. 나의 요구 사항만을 주창하며 윽박지르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결과와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기대와 큰 배려심이 둘 모두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한 감정과 믿음 역시 두터워진다. 


'당연'의 기대와 '혹시'의 기대 


나 스스로가 나에게 거는 기대는, 당연이라기보다는 혹시에 가까운 기대다. 어느 정도의 노력을 동반한 후 결과를 기다리는 겸허한 기대감이다. 이러한 기대감은, 충족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에게 더 좋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다음엔 다른 방향으로 노력을 해본다거나, 이 길이 맞지 않는 길이라는 판단과 함께 새로운 길을 찾는 기회를 선사해 줄 수도 있다. 


반면에 타인의 기대는 당연의 기대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은 대상자가 될 수 없다. 타인이 아무리 가르침을 주고 소리를 지르고 타일러도 상대방은 내가 아니기에, 상대가 공감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일 뿐이다. 아이들을 여러 학원에 보내 놓고 성적이 잘 나오길 바라는 부모의 기대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연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맞추길 바라는 기대감, 내가 우연히 방문한 식당의 아르바이트생이 최고급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감. 이런 기대감들은 당연히 가질 수 있지만, 절대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대부분) 필연적으로 실망까지 이어지는 관계의 길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물론 사람이 바깥을 향하는 기대감을 갖지 않기란 쉽지 않다. 나도 너무 어려운 일이다. 누구든 나의 말을 잘 듣는 아이를 바라고, 좀 더 매너 있고 로맨틱한 연인을 바라며, 합리적이고 현명한 상사를 바란다. 그것도 나름 인간으로서의 권리이고 특성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기대감을 무기로 앞세워 서로에게 상처 주고 관계를 망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기대감은 그저 나만의 것으로 간직하고 상대방이 내 기대감을 완벽히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부를 땐 기대감이고 사랑이고 관심이지만, 상대에게는 부담이고 의무이고 압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기대감이 진짜로 사랑에 기반한 것이라면, 기대감이 상대방의 고통에 앞설 수는 없다. 


올 한 해는 나부터도, 당연의 기대는 조금 내려놓고 혹시의 기대를 위해 순간마다 깨우치고 배우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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