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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Apr 16. 2020

[일상첨화#2] 중고책 찬양론

전자책, 도서관 이용, 그리고 결국은 중고책

*일상첨화 [日常添畫] : 사진을 더한 일상을 매일 기록하는 개인 프로젝트입니다. 별 것은 아니고, 하루에 가장 인상 깊은 사진 하나를 골라 주절주절 쓰는 일기장입니다.


이 메모는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장소

우리 집 식탁


시간

2020.04.16 목요일 저녁 


날씨

덥고 일교차가 컸다(고 한다. 저녁에만 나가봐서 잘 모르겠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것 치고 새 책을 사는 데 좀 인색한 편이다. 책을 꽤 빨리 읽어버리는 탓에 눈길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지나가버리는 지면들이 아깝달까. 그냥 괜한 고집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기분이 그렇다. 


이런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일단 처음 택했던 방안은 전자책. 전자책에 대한 거부감도 별로 없었고, 크레마를 사용해본 결과 솔직히 책을 기억하고 소장하는 데는 전자책만 한 것이 없다. 몇 권의 책을 들고 다녀도 무게감이 없고, 언제든 읽고 싶은 구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이패드와 ebook 리더기인 크레마를 둘 다 사용해봤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ebook 리더기를 사용했을 때 훨씬 종이책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고 눈에 부담도 덜해서 좋아했다. 전자 잉크라나 뭐라나. 


하지만 전자책은 몇 달 만에 방구석에 처박혀버렸다. 그 이유는 조금 변태적일 수도. 오히려 너무 가벼워서 정이 안 갔달까. 다 읽어놓고 나서 이런 말 하기 좀 미안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이 들어가 있는 가방 탓에 어깨가 저릿해올 때마다, 이 책을 어서 읽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더 불타오르는 나로서는 전자책이 독서를 하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덜했다. 그리고 책을 뒤적거리는 사각사각하는 소리, 지금 책을 어느 정도 읽었는지 잠들기 전마다 체크하는 습관, 손글씨로 메모를 적고 싶은 욕망, 자주 잃어버리는 탓에 자연히 자주 바뀌는 책갈피를 꽂는 재미 같은 것들이 충족되지 않았다. 


그다음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는 것이었는데, 이게 또 장단점이 참 명료했다. 반납 기한 안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또 다른 동기 부여가 되기는 했지만, 내 책이 아니다 보니 내 흔적을 남길 수 없어 답답했다. 무료라는 장점도 있지만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결국, 빌려 읽고 책이 너무 좋아 새 책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놓고 다시 안 펼쳐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결국 최근 정착한 마지막 방법은 중고책이다. 방에 쌓여있던 새 책을 알라딘이나 YES24에 중고책으로 팔기만 해 봤지, 중고책을 좋아라 사지는 않았었는데, 몇 달 전에 부산에서 잠시 들렀던 중고 책방 거리가 너무 인상적이었나 보다. 읽고는 싶었지만 우선순위에서 미뤄두었던 책들을 싸게 살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방 아저씨께 물어보면 쌓여있는 책더미 어딘가에서 금세 보물처럼 찾아오셨다. 도대체 어떤 알고리즘으로 책을 정렬해놓으신 건지 다시 생각해봐도 미스터리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사다가 요즘은 중고책으로만 책을 사기 시작했다. 이제 다른 방법은 있지도 않고 옮겨갈 듯싶지도 않다. 중고책을 읽는 게 생각보다 참 즐거워서다. 책의 예전 주인이 어디까지 책을 읽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책에 고스란히 보인달까. 목차 한 장 넘기지 않은 새 책조차도, 전 주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지 궁금하게 하기에, 상상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중고책은 그 존재 자체가 이야기보따리 같다. 


요즘 읽고 있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에는 위의 사진에서처럼 메모가 그득하다. 중요한 문단에는 큰따옴표도 들어가 있고, 핵심 단어에는 동그라미, 밑줄, 목적지 없는(없었던) 질문들이 적혀있다. 이런 식으로 열심히 읽는 습관을 꾸준히 가지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몇 장 안 읽고 메모를 그만두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느덧 거의 끝장에 가까워져 가는데도 메모와 질문이 멈추질 않는다. 이 전 주인, 대단한 사람이다. 왠지 지고 싶지 않은 질투심과 존경심이 같이 들고, 내 생각과 이 사람의 생각이 같은지 다른지 궁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메모를 찾게 된다. 


중고책의 묘미란 게 이런 거다 싶다. 시간을 뛰어넘어서 누군가와 같이 지식을 공유하고 책을 읽어가는 경험. 가끔은 누군가가 포기한 어려운 책을 내가 읽어냈다는 우월감에 도취될 때도 있고, 반대로 너덜너덜한 책을 나는 첫 장조차 읽기 힘들 때도 있다. 지나치게 깔끔한 위생관념이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중고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아니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 재밌는 경험이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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