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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Jun 06. 2016

응답하라 아날로그

S노트가 영문도 모른 채 삭제된 그날,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인간 빼고 다 스마트 해지는 세상!

잠깐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이 참 이렇게 편리하고 스마트할 수가 없다. 어깨가 무겁도록 들고 다녀야만 했던 그 무거운 장편 소설책들을 아이패드 하나에 다운로드하면 (심지어 아이패드의 무게를 1그램도 늘리지 않고) 그만이다. 예전에 여행을 갈 때는 종이 지도와 일정표를 일일이 뽑아다가 메모하고, 필요한 전화번호들을 적어 가고, 타야 하는 버스와 기차를 모두 메모하고 조사해 갔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에 앱 하나 깔면 준비 끝이다.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다른 가족이 받으면 '안녕하세요 ㅇㅇ 친구 **인데요 ㅇㅇ 좀 바꿔주세요'라며 좋든 싫든 친구네 가족들과 목소리와 이름을 텄었는데, 이제는 카카오톡이나 문자 하나 남기면 괜히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주위의 모든 것이 스마트해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것들도 많다. 친한 친구들의 생일과 전화번호는 거의 대부분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고, SNS를 인식하지 않은 채 순간을 즐길 기회도 많이 놓친다. 개인적으로 이 스마트한 세상의 폐해는 '인간의 게으름'이 팽배해진 데 있다고 몸과 마음을 다해 느낀다. 일단 집을 나서면 약속 시간을 바꾸기 어려웠던 과거에는,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다 했었는데, 이제는 이래저래 핑계를 댈 수 있는 유예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약속 시간에 정확히 누군가를 만난 적이 거의 없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늦는 사람은 늦겠지만. 미안함의 크기나 늦는 정도가 분명히 크게 달라졌다. 나만 해도 10분쯤 늦는 건 뭐, 일도 아니다.


최근 아날로그를 더욱 그리워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2년 전 SNS를 끊던 그 시점부터 나는 갤럭시 노트를 주로 사용하며 S노트에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놓고는 했다. 나중에 공부하고 싶은 소재들이나, 나에게 영감을 줬던 일상들, 최근에는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 보고 싶은 영화나 책들도 적어뒀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S노트가 영문도 모른 채 전체 삭제가 되어있었고, 나는 완전히 좌절했다. 수첩 같은 곳에 적어뒀더라면,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그만 일 텐데.(잃어버린다고 해도 그건 최소한 내 잘못일 테니까 억울함은 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다고 해도, 수첩을 몇 번 열어보고 손으로 적고 하면서 좀 더 기억 속에라도 남았을 텐데 하는 무의미한 상상을 해봤다. 갑자기 나의 생각을 모두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S노트를 잃고 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디지털 산만증


2010년쯤 친구들이 처음 스마트폰을 사 왔을 때 Wifi와 3G가 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 기억난다. '네이트 버튼이랑 비슷한 거야?'라는 어리석은 질문도 던졌었는데. 그 이후로 6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서 스마트폰 안 쓰는 사람 만나기는 거의 길가다가 연예인 볼 확률이랑 비슷할 수 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우리는 스마트한 기기들에 익숙해졌고 이제 웬만한 신기술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도 못한다. 스마트폰을 비롯하여 자동차도 냉장고도 시계도, 스마트 어쩌고 하는 것들이 우리의 주위를 야금야금 '스마트한 세상' 속으로 포획  . 인간만 빼고!

Banksy의 작품 Mobile Lovers

뭐, 다 좋다. 그런데 이상하게 작년쯤부턴가, 슬슬 이런 '스마트 어쩌고들'에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남들 하는 소리에 많은 영향을 받는 성격 인터라, 시종일관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얼굴 한 번 안 본 사람들조차도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적지 않은 스트레스로 작용했었던 모양이다. 어디를 가든 휴대폰을 놓지를 못했고, 세상에 벌어지는 일 하나라도 놓치면 큰 일날 마냥, 거진 '속박'되어 살았다. 앞에 소중한 사람이 있든, 몸에 닿는 햇볕이 따뜻하고 포근하든, 나의 시선은 스마트폰의 작은 면적 밖으로 벗어나지를 못했다. 삶에 집중하지 못했다.


동시에, 안 그래도 똑똑하지 못한 머리가 점점 굳어가는 것 같아서 두렵기도 했다. 특히나 이 '검색'이나 '피드'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게, 너무 쉽게 찾아지는 정보들이라서 또한 너무 쉽게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나 자신이 정보의 바다 속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바다가 스쳐가는 미역 줄기가 된 기분이었다.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내 것이 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너 이거 알아?
들어는 봤어


이제는 내가 이걸 아는지 모르는 지조차 불명확하다. 자연스럽게 '들어는 봤다'라는 말만 늘었다. 참 웃기는 말이다. 뭘 아냐는 질문에,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들어는 봤다니. 나쁜 대답이나 잘못된 대답은 아니지만, 어쩐지 말하고 나면 부끄러운 기분이 조금은 든다. 이러한 대화 습관은 얼마나 내가, 그리고 일부의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히 '디지털 산만증'을 겪고 있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제대로 아는 것도 거의 없고, 완전히 모르는 것도 거의 없다. 그 말인즉슨,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완벽히 알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스로로부터 말이다. 이런 말을 자주 하는 나를 발견하면서부터, 점점 이 스마트한 세상에 대한 공포감과 피로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똑똑하고 센스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을 잘 이용하면서 더욱 똑똑해질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편은 아니었다.




디지털 피로증


눈앞에 멋진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좁은 화면을 통해 세상을 보기 바쁘다


조금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피로감을 느낀 것은 SNS였다.  재작년까지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열심히 했다. (그때는 카메라 성능이나 지금 같은 예쁜 필터 카메라 앱들이 별로 많지 않아서인지 인스타그램은 SNS로의 기능이 그다지 활용되지 못했던 것 같다.) 즐거운 순간을 맞거나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면 예외 없이 카메라를 치켜들고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사진들을 SNS에 올리면서 친구들을 태그 하거나 태그 당하고, 위치 정보를 첨부해두고, 짧은 감상을 덧붙여 포스팅했다. 서로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면 행복한 것 같은(?) 기분을 누렸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행복한 순간과 SNS는 떼어놓으래야 놓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리기 시작했다. 탈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아무 말 않고 감상하며 마음속에 이 장면을 고스란히 담는 것이 아니라, 예쁜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려야만 할 것 같은, 나 외에는 그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의무감이 들었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들으면 '이 이야기라면 좋아요를 많이 받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의 이야기'를 간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를 포스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래, 이제 내 삶의 순간순간을 열심히 즐겨야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이 말 쿨한데? 페북에 올려야지'
라는 생각이 드는 아이러니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싫어졌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SNS를 했었기 때문에, 그만큼의 자기혐오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혼자 있는 시간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보내는 시간에 페이스북이나 기타 웹 사이트들을 무한 새로고침하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페이스북 계정에 연동된 서비스가 많다는 구차한 이유(?)로 미뤄왔던 탈퇴를 작년 첫날에 저질러버렸다. 이러한 결심에는 Youtube에서 본 루이스 C.K. 의 코난 쇼 클립도 꽤나 도움이 됐다. 약간은 극단적이고 편협할 수도 있는 시선이지만, 그가 짚어낸 특성들은 많은 수의 SNS 유저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과거의 나에게라도 말이다. 

코난 팬이자 루이스 팬이기도 한 나로서는 괜히 더 힘이 실리는 영상이었더랬다. 아주 재밌으니 꼭 보기를.  




아날로그 회복기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그만두고도 한동안은 손이 심심해 어쩔 줄을 몰랐다. 카톡도 한두 번이지, 하루 종일 붙잡고 시간을 때우기는 한없이 부족하다. AI랑 대화하는 것이 아닌지라, 상대방이 씹으면 언제 다시 무한 심심의 세계로 돌아갈지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슬슬  취미 활동을 찾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공부도 시도했다. 아마 미친 듯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던 듯 싶다. 일기도 썼다. 약간의 디지털이 빠진 곳에 약간의 아날로그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IT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하지 않으며 산 것은 아니다. 내가 제어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많은 플랫폼들은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다만, 모든 것의 중심에 나의 삶이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해냈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어색하지 않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순간순간의 감정을 바로 뱉어내고 날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하고 곱씹어보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 해보고 싶은 것들을 손으로 적어서 벽면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두기도 했다.

요즘은 사실 브런치를 쓰면서 자주는 못쓰지만, 디지털에서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살짝 방향을 틀면서 굉장히 좋았던 것이 바로 '손으로 글쓰기'였다. 손으로 글을 쓸 때면 내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손이 그것을 옮겨 적는 속도가 훨씬 느리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 쓰면서도 내가 쓰고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두 번 세 번 더 할 기회가 생긴다. 컴퓨터로 작성하는 글들이 사실 거의 생각나는 대로 흘겨쓰기 십상인 것과는 대조된다. 느림이 주는 기회인 것이다. 쉽고 깔끔하게 지우지도 못하기에, 또한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나서야 펜을 종이에 댄다. 더 많이 집중하고 더 많이 신중해진다.


고3 때처럼, 하루하루 할 일들을 일정표에 적기도 했다. 휴대폰을 통해 한 번의 터치만으로 TODO 리스트를 추가하거나 지우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매일매일 할 일은 똑같더라도, 손으로 적은 일정들은 모두가 다른 모양새의 글자를 입고 있다. 체크박스를 누르는 느낌보다, 할 일을 다하고 빨간색 펜으로 할 일 리스트를 하나하나 줄 쳐가며 지우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성취감을 나에게 안겨준다.  


손으로 할 수 있는 이렇게 작은 것들로도 하루하루가 조금은 알 찬 기분이 들었다. '내 손으로 한다'라는 게 이렇게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는지 잊고 있었다. 불편하고 어려울수록, 성취감은 커진다. 조금 불편한 것들을 하기 시작하고 나니, 삶이 약간은 더 풍부해진 기분이 들었다.




비록 아주 작은 아날로그에의 귀환이었지만, 지금도 아날로그적인 것들을 보면 조금씩 설레는 마음이 든다. 얼마 전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동료를 보면서도 괜히 나도 해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라디오 주파수 맞춰놓고 좋아하는 방송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괜히 감성에 젖는다. 하지만 이미 너무 그것들에서 멀리 와버렸고,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향수일 뿐 괜한 고집으로 연결 짓기는 싫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 내가 아날로그 타령을 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웃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응답하라 시리즈나 복고가 유행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나도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것일 뿐이다. 조금은 촌스럽고 느리고 불편했지만 그만큼 더 열중하고 집중하면서 살았던, 아니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일상이 그리운 것이다. 대부분의 '복고'도 비슷한 이유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일 것이다.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지고 편해지지만, 그만큼 어렵게 성취하는 기쁨이나 피나는 노력 같은 가치들은 점점 사라진다. 편지 하나를 부치기 위해서 우표를 사고, 편지지를 사고, 손이 아프도록 빼곡한 글자를 채우고, 봉투를 예쁘게 붙이고, 주소와 우편 번호를 손으로 적어서, 빨간 우체통에 밀어 넣고, 편지가 바닥에 '텅'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그런 기분을 느끼기에, 세상은 너무나 조바심 타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카톡의 숫자가 당장 사리지지 않기만 해도 싸움의 소지가 되고는 한다. (그 옛날 전쟁에 남편을 보낸 아내들이 어떻게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뎠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지금에야 나는 S노트에 담은 내 아이디어들과 생각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끝났지만, 과연 우리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없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서울 어딘가에 가기 위해서 무슨 대중교통을 언제 어디서 타야 할지조차 모르는 우리는 정말 스마트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손 놓고 행복해하고만 있어도 되는 걸까? 엔지니어의 입장에서야 이러한 기기들과 네트워크가 끊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전부를 외부에 떠넘긴 채 껍데기가 되어 살아가는 것은 옳지만은 않아 보인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소중한 것들에 더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야 한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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