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퇴근길과 아파트 소리
여름이다-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맨얼굴로 맞으며 버스를 기다렸던 겨울 출근길 아침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바로 그 여름이 왔다. 우습게도 숨이 막히는 따가운 땡볕 밑에 서있는 여름날이면, 우리는 또다시 겨울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것이지만. 어쨌든 여름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혹은 시작되어 버렸다고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계절을 다 가진 계절 부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우리는 각자 스무 번의, 서른 번의, 혹은 그 이상의 여름을 만나고 보냈다. 물론 한국 밖에서도 어련히 여름이라는 것이 오고 가기는 매한가지겠다. 그렇다고 다 같은 여름의 영상을 누리는 것은 아닐 거라고, 토종 한국인으로서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적어도 나는, '여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비치볼을 하는 검게 그을린 젊은 남녀의 모습들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선풍기 앞에서 거의 마시듯 베어 물었던 수박 맛, 여의도 한강공원 분수 앞에서 시켜먹었던 치킨과 맥주의 시원함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물론 모기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나, 높은 습도를 동반하는 후덥지근함에, 전신으로 느꼈던 짜증도 되살아나는 듯하다.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에서
달력 속 어제, 오늘, 내일 세 칸만 두리번거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여름은 주위에 들어차 있었다.
그런 여름이, 요즘 들어 잦은 비 소식(그리고 쉴 새 없이 울리는 호우주의보, 폭염주의보 재난 문자)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훌훌 시간을 타고 내 옆에 와있었다. 문득 옷차림을 보니 나는 긴팔이 아니라 반팔을 입고 있다. 카페에 가면 따뜻한 아메리카노 대신 본능적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다른 계절에 비해서 왠지 여름은 '귀신같이 잽싸게 온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름은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오'하며 끊임없이 존재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나의 정신을 깨우는 노크를 쿵쿵, 계속 치고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들어버렸다.
광경으로, 소리로, 느낌으로, 냄새로, 맛으로.
여름이 두드리는 감각들은 참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항상 상쾌하지는 않지만, 오랜 연인처럼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좋다가도 미운 게 여름인가 보다.
작렬하는 태양.
입고 있던 봄꽃을 벗고 푸른 살결을 내보이는 나무와 풀들.
하늘과 흐릿한 경계를 두고 출렁이는 광활한 바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보편적인 이미지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은, 여름이 왔다는 신호라기보다는 이미 여름에 압도된 광경이다. 더군다나, 나 같은 직장인 혹은 출퇴근 외에는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름보다는 '여름휴가'의 이미지이지 않을까.
오히려 내가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여름의 광경은 '붉은 퇴근길'이다. 겨울을 포함하여 오랜 기간 햇빛 없는 컴컴한 퇴근길을 지났었다. 혹은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이 퇴근길이 어제랑 같은지 다른 지도 모르고 집에 가기 바빴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 웬일인지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오기까지 십여분 넘게 남았다는 잔인한 소식에 우연히 고개를 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칸의 여왕이 되어 밟는 레드 카펫까지는 아니겠지만, 노을이 옅게 남아있는 붉은 하늘을 머리 위로하고 맞이하는 퇴근길이 적잖이 좋았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여름의 감각은 청각이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열린 베란다, 창문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일상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집집마다 다른 TV 채널 소리, 깔깔대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 설거지하는 소리들은 각각은 소음 일지 모르지만, 한 데 뭉쳐 '사람 사는 아파트 소리'가 된다. 괜히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등의 공동 주택에서 주거하는 우리나라이기에 들을 수 있는 독특한 소리일 수도 있겠다.
아래윗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엘리베이터에서 어쩌다 이웃과 마주칠 때면 데면데면한 우리다. 그렇게 굳건히 세워진 이웃 간의 장벽은, 여름밤의 더위가 강제로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 틈을 통해 무력하게 무너져버린다.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게 모인 소리는 '마을의 사람 사는 소리'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집에서 들리는 바깥소리들도 정겹다. 창문가에 머리를 두고 자는 내 방 구조 덕에, 열린 창문으로 별의별 소리가 들려온다. 싸우는 연인들의 소리, 웬일인지 새벽 시간에 어머니를 울부짖는 아저씨의 외침, 그 아저씨와 비슷하게 애타게 엄마를 찾는 아기 고양이의 울음소리. 사람들로 북적이는 번화가나 쉴 새 없이 바쁜 사무실이 아니라, 되려 이런 소리들에서 '아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한다.
사실 나는 겨울보다는 여름을 좋아하는 체질이라, 쓰고 보니 여름 예찬 같기도 하다. 내 몸은 움츠러드는 겨울보다는 늘어지는 여름이 낫다고 느낀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의 나는 엊그제 더위를 먹고 두통에 죽을 뻔했다.) 병 주고 약 주는 듯한 여름밤의 시원한 온도, 실내에서 바깥의 비 오는 광경을 구경하는 여유, 더위 속에 한 입 베어 물은 아이스크림에 대한 감사함 같은 것들은 여러 번 경험해도 언제나 즐겁다.
땡볕만 잘 피한다면, 여름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