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과 업보
비 내리는 섬진 강변을 따라 쌍계사 가는 길에
- 인연과 업보
詩. 갈대의 철학
인연의 연습은 필요 없다
인연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인연이 찾아오지 않는 것처럼 인연은 곧 업이라
비가 내리는 것은 구름 위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구름 아래에 내리는 것처럼 비는 언제나 숨을 곳이 있고 구름은 언제나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
태양은 구름 아래에 햇살을 돋을 수 없으나, 구름 위에 언제나 빛나며
저 창공 위로 날아가는 새들은 하늘이 높은 줄을 알아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으나, 더 높이 날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사도 저 인연 됨에 비할 데가 못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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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 따라
쌍계사 가는 길은
지금은 초록이 만삭이 된 십리 벚꽃 길 넘나 든다
도로 양쪽 사이로 울창한 고목들의 수령에
그 시대의 암울적이고 우울했던 시대상을 엿보는 것처럼
봄비 같지 않은 비가 곱게 내리지 않는다
섬진강변의 길
이곳은 버스 안내양 아주머니가 주인공이시다
섬진강변 따라 한적한 시골길 넘나들고
비 오는 날 탁주 한 사발을 들이켰는지
얼굴도 곱고 말도 다정다감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섞어가며
버스 기사분과 꿍짝도 잘 맞아
여정길 오는 사람
이 지역 저 지역 넘나드는 사람들과
정다운 호흡을 맞출세라
한 번쯤 물어보지 않았으면 서운케 했을 법이라
오고 가고 타는 사람 귀경 몇 안되고
그 머나먼 길을 기사분과 한 두 번 수 다지
익히 다음 정류장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그대의 맘이라
한 번 궁금한 것을 물어보니
일장연설 각설하시며
첫 보면 알 듯한 창가에 스쳐 지나는 풍경마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구수하게 들려준다
한참을 피로에 지친 몸에
나긋한 고운 목소리가 금세 자장가로 들리니
하마터면 내리고 서는 버스 정류장마다
내 정류장인 줄 착각하고 연신 감았던 눈을 뜬다
안 게시면 오라이 하시던
옛 추억된 안내양 아주머니
손수 무거운 짐들을 들어주고 내려주며
한가롭고 따분할 정도의 길을
연신 담배 연기 빨고 내 뱃는 담배 연기처럼
어디라고 말을 건네주는 입담 소리와
잠깐 스쳐 지나는 영상들은
빗속을 달리며 안갯속을 헤매는 버스는
말없이 내리는 빗속을 아무 음악 소리도 없이
내리는 빗소리에 젖어 들어간다
다원에서 우산 대신에 즐겨 입던 비닐 비옷을
아무 말없이 건네주신 금향 다원 아주머니
짧지 않은 하루를
다음 날 내리는 비가
인연의 고리를 더욱 깊게 만든다.
상냥하다 못해 친절까지 하시니 말이다.
전날에 나를 보며 아는 체도 하지 않던 개가
먼저 다가가 쓰다듬어 주니
얼굴을 비벼대며 우는 소리로 반긴다
개줄에 묶여 있던지라,
가여워 목줄을 풀어주니
그렇게 측은지심이 들던 개가
어느새 생기가 돌아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주인도 뭔가 빠르게 지나갔다고 하시며
개 나이 아홉 살에 늙은이 취급하던 집주인은
집 나가 열흘 지나도 돌아오지 않던 개였다며
아무 일 없듯이
돌아왔던 이력도 있다고 하면서
개 주인은 무언가 지나친 것을 보았다고
난 사실을 말했다. 풀어줬다고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반갑게 다시 돌아왔다
비 내리는 쌍계사에
우산을 사려고 하니 문은 잠겨있고
옆집 식당 할머니께 여쭤보니 어딜 갔다고
친절하게 우산을 빌려주신다
인연 된 만남은
따뜻한 만남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의 만남은 헤어짐이 되어야 한다
인연이 되려는 사람과
인연이 우연이기를 바라는 사람과
인연을 기다리는 사람과
인연이 아니기를 바라는 사람과
인연이 인연이 이었고 아니었던 사람들과
우리의 인연은 기다리지 않는 만남이어야 한다
인연이 되려거든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누군가의 인연이 되고 싶어 하고
우리는 그 누군가의 악연이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인연은 필연이 우연이기를 바란다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을 낳고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의 악습이 시작된 것처럼
악습의 폐단은 반드시 인연을 끊어져야 한다
그러나 인연의 고리는 쇠사슬과 같아서
그것은 쉽게 끊어지지 않으며
끊어지더라도 마음의 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의 연속성이다
인연 된 마음은 공양 한 그릇에 빈 공간이 없어야 한다
그대에게서 담을 수 없는 마음이
그대에게서 버릴 수 없는 마음이
그대에게서 가질 수 없는 마음이
그러한 마음은 곧 떠난 마음에서 시작된다
2016.5.24 쌍계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