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면(冬眠)
눈이 내리는 날에는 나는 치악산으로 간다(8)
- 동면(冬眠)
시. 갈대의 철학[蒹葭]
겨울
시나브로 얼어가는
죽음의 계곡에서 태어난 악마
나의 마음이
단단히 이 겨울 채비에
아직도 갈길에 얼지 못하는구나
계곡의 물소리
여름철 소낙비도
나의 심금을 쩌렁쩌렁 울려주는데
뉘 부르는 들려오는 소리에 이끌러
이곳까지 올라왔건만
네 마음 들려오는 소리가
이렇게 다른데 있구나
나의 마음이 아직 동면(冬眠)에 들지 못함을
이 세계에 너와의 다른 세상을 꿈꾸는
피안(彼岸)의 계곡에 들어서지 못함이었다
숲은 일찌감치 얼어
겨울나기 연습을 시작하고
나는
사랑타령
이별 타령으로
떠나간 님 생각에
어이 한겨울 한 세상을 지낼꼬
이 기나긴 겨울을
겨울도 점점 얼어가는데
아직도 그대 떠난 후
내 마음이 얼지 않은 이유가
아직도 그대의 온기가 남아서일까
계곡의 얼음도 얼고
숲도 얼어가는데
그나마
그 속에 흐르는 물은 얼지 않고
제갈길로 흘러가는구나
하물며 여름이 와도 녹지 않고
차가운 겨울이 오면
더 녹지 않을 거라
얼어가는 그대 마음
그대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녹여서
그대 갈길로 떠나가게 할 수 있을까
상고대도 햇살에 녹아
눈이 되어 내리는데
나는 이제껏 너를 위해
흘릴 눈물도 보태지 못하였구나
상고대 너마저 바람에 나부껴
네 마음을 털어내는데
나는 이제껏 너를 위해
떠나보내야만 하는 이유를
이 겨울이 오고 얼어도 찾지 못하였다
꽃이든
상고대든
사람이든
떨어지면 추하고 보잘것없이
남는 게 없어라
아침에 올라가 아름다운 너를 반기며
좋아했었는데
금세 해 중천에 뜨고
어느새 반긴 지가 금세이었거늘
금세 참지 못하여
낙화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쫒아가느냐
너 역시
대쪽 같은 대나무의 기질이 남아있기를 기대했건만
나 역시
보잘것없는 한 점의 바람에 떨어지는
상고대의 눈꽃만도 못하였나니
아 거룩하도다
못다 이룬 이 슬픔을 어이할거나
다시 찾아올 봄날이여 기억해다오
네 죽음의 계곡에서 피어날 못다 한 사랑
진정한 가면 속에 피어난 네 모습을
봄바람 낙향으로 떠나야만 했던
슬픔을 간직한 어느 노인의
깊이 파인 주름살에 피어난 뿌리들
버림받은 자
깊은 고뇌의 반항
악마의 숲 속에서 메아리 되어 울리는 영혼들
봄바람 따라 떠난 그대가 상고대로 피어나고
사모하는 연정(戀情)한 마음에
떨어진 눈꽃이
그대 구두위에 얼룩져 떨어진 꽃신이 되구려
꽃잎의 낙화에 의지한 채 떠나야만 하는
나 자신 조차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이 마음을 어찌 너와 비할 데가 있으랴
2018.12.26 치악산 곧은재 가는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