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 불안의 진폭

Amplitude of Anxiety

by 늘람

⚠️ 이 글의 성격에 대한 안내
이 시리즈는 정답을 선언하는 글이 아닌, 변화하는 세계와 함께 조금씩 다듬어가는 사유의 기록입니다. 데이터와 연구가 축적되거나, 이후 편에서 더 깊은 맥락이 드러나면 일부 내용은 수정되거나 재구성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류가 아닌, 더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완성본'이 아닌 '진행 중인 사유'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같은 헤드라인, 다른 세계

2023년 3월 14일.

OpenAI는 GPT-4를 공개했다.

발표 자료에는 여러 벤치마크 결과가 담겨 있었지만, 언론과 전문가들이 주목한 것은 하나였다.

'미국 변호사 시험(Uniform Bar Exam) 상위 10%'

GPT-3.5는 불과 4개월 전, 같은 시험에서 하위 10%였다.

4개월 만에 AI는 하위권에서 상위권으로 극적으로 상승했다.


법조계는 술렁였다.

Stanford Law School의 CodeX 연구진이 GPT-4에게 변호사 시험을 치르게 했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객관식뿐만이 아닌 서술형까지 통과했다.

그 점수는 응시자의 평균을 넘어섰고, 상위 10% 안에 속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로스쿨 3년, 시험 준비 3개월, 하루 10시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그런데 AI는 단 몇 초 만에 같은 시험을 통과했다.

법률 전문 매체들은 즉시 분석 기사를 쏟아냈다.

'AI가 법률 서비스를 재편할 것인가?'

'주니어 변호사의 업무가 사라지는가?'

'법률 검토, 계약서 작성, 판례 조사 — 이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가?'


University of Florida Law School의 Jiaying Jiang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의뢰인은 변호사가 능숙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것을 신뢰한다. 만약 변호사가 언어 모델의 결과를 철저히 검토하고 검증하지 않는다면, 이는 과실 청구로 이어질 수 있다.'

불안이었다.


같은 날.

기술 커뮤니티는 환호했다.

TechCrunch, The Verge, Hacker News.

댓글란은 흥분으로 가득 찼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 정말 재미있어지겠는데.'


개발자들은 즉시 API 신청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Duolingo는 GPT-4를 이용한 새로운 언어 학습 기능을 발표했다.

Stripe는 비즈니스 웹사이트를 스캔해 고객 지원 직원에게 요약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공개했다.

Microsoft는 Bing Chat이 이미 GPT-4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기대였다. 그러나, 같은 헤드라인이었다.


'변호사 시험 상위 10%'

하지만 법조계와 기술 커뮤니티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한쪽에는 불안이, 다른 쪽에는 기대가 밀려왔다.


LexisNexis가 2023년 3월 실시한 조사는 이 양면성을 보여준다.

변호사의 대다수(86%)가 생성형 AI를 인지하고 있었다.

절반 이상(51%)이 이미 사용했거나 계획 중이었다.

대부분(84%)은 효율성이 증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동시에, 법률 부정확성에 대한 우려도 컸다.

과실 책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의뢰인 신뢰 훼손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같은 사람들이었고, 같은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스며드는 감정은 정반대였다.


기대와 불안.

희망과 두려움.

흥분과 공포.

그리고, 그 진폭이 달랐다.


평형점으로부터의 거리

물리학에서 진폭(Amplitude)은 진동하는 물체가 평형 위치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는지를 나타낸다.


놀이터 그네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그네는 가만히 있을 때 수직으로 내려와 있다. 이것이 평형점이다.

그네를 뒤로 당겼다 놓으면, 평형점을 지나 앞으로 올라간다.

뒤로 멀리 당길수록 앞으로 더 높이 올라간다.

이 움직임(변위)의 폭이 진폭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같은 힘으로 밀어도 사람마다 그네가 다르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어떤 위치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움직임의 폭이 달라진다.


인간의 심리도 같다.

우리 각자에게는 심리적 평형점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안정된 자기 인식점이 있다.


외부 정보는 그 평형점을 흔든다.

정보가 평형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진폭은 커진다.


법조계의 평형점은 '법률 전문성'에 있었다.

로스쿨 3년, 변호사 시험, 실무 경력.

그 모든 시간이 '법률 전문가'라는 한 점에 모여 있었다.


GPT-4의 '변호사 시험 상위 10%' 정보는 이 평형점을 정면으로 흔들었다.

'AI가 법률 전문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지?'


평형점에서 멀리 벗어났다.

그래서 진폭이 컸다.


기술 커뮤니티의 평형점은 'AI 도구 활용'이었다.

이미 GPT-3.5를 써왔고, API로 서비스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성은 'AI와 함께 일하는 개발자'였다.


GPT-4의 발전은 이 평형점을 강화했다.

'더 좋은 도구가 생겼다. 더 잘할 수 있다.'

평형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폭이 작았다.


같은 정보였다.

하지만 각자의 평형점에서의 변위가 달랐다.

법조계는 정체성에 위협을 느꼈고, 법률 전문가로서의 평형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 진폭은 컸다.

기술 커뮤니티는 정체성이 강화되었고, AI 도구와 함께 일하는 자신들의 평형점에 더 가까웠으며, 그 진폭은 작았다.


진폭을 만드는 것은 정보의 크기가 아닌, 그 정보와 나의 평형점(정체성) 사이의 거리이다.


손실은 이득의 두 배

McKinsey가 2024년 실시한 조사는 흥미로운 숫자를 보여준다.

조직의 대다수(78%)가 AI를 도입했다.

하지만 실제 비즈니스 가치로 전환한 곳은 전체의 4분의 1(26%)에 불과했다.

나머지 절반 이상(52%)은 샌드박스에 머물렀다.


시작했지만 확장하지 못했다.

파일럿 프로젝트는 진행했지만, 전사 확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IBM 연구진의 표현을 빌리면 '안전지대에 갇혀' 있었다.


같은 조직 안에서도 양면적 반응이 나타났다.

AI 사용자의 대다수(90%)가 시간 절약을 경험했다.

동시에 조직 구성원의 3분의 2(65%)가 일자리 대체를 우려했다.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었다.


오전에는 'AI 덕분에 2시간 절약했어'라고 말하지만,

오후에는 'AI 때문에 내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를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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