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 인식의 마찰력

Friction of Perception

by 늘람

⚠️ 이 글의 성격에 대한 안내
이 시리즈는 정답을 선언하는 글이 아닌, 변화하는 세계와 함께 조금씩 다듬어가는 사유의 기록입니다. 데이터와 연구가 축적되거나, 이후 편에서 더 깊은 맥락이 드러나면 일부 내용은 수정되거나 재구성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류가 아닌, 더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완성본'이 아닌 '진행 중인 사유'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접촉면의 본질

책상 위의 책을 밀어 본다.

처음엔 움직이지 않는다.

마찰이 책을 멈춰 세운다.


그렇다면 내 손은 어떻게 책을 밀 수 있는 것일까?

손가락과 책 표면 사이에도 마찰이 있다.

그 마찰이 없다면, 손가락이 책 위를 그냥 미끄러질 뿐이다.

힘을 전달할 수 없다.


마찰은 책을 멈추는 동시에, 책을 밀 수 있게 만든다.

저항인 동시에, 운동의 조건이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움직여보자.

발바닥과 바닥 사이에도 마찰력이 있다.


이 마찰력이 없다면

발을 뒤로 밀어도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제자리에서 허우적댄다.

심지어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마찰은 걷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우리가 걸을 수 있게 한다.


걷기 위해 발을 뒤로 민다.

발과 바닥 사이의 마찰이 그 힘을 받아낸다.

그 저항 덕분에, 몸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마찰이 없다면,

발을 뒤로 밀어도,

나아가지 못하고 발만 미끄러진다.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멈추는 것도 마찬가지다.

발을 앞으로 내밀어 바닥을 민다.

마찰이 그 힘을 받아낸다.

몸이 멈춘다.

마찰이 없으면, 멈출 수 없다.


마찰은 운동을 방해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찰은 운동을 조절한다.

시작하고, 방향을 바꾸고, 멈출 수 있게 만든다.


자동차 바퀴도 마찬가지다.

엔진이 바퀴를 돌린다.

바퀴와 도로 사이의 마찰이 그 회전을 앞으로 가는 힘으로 바꾼다.


마찰이 없다면, 바퀴는 헛돈다.

자동차는 제자리에 있다.


브레이크도 마찬가지다.

브레이크 패드와 바퀴 사이의 마찰이 없다면,

브레이크를 밟아도 멈추지 않는다.


마찰은 자동차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찰은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고, 멈추게 한다.


물리학에서 마찰은,

종종 '손실'이라고 학습한다.

에너지를 열로 낭비하는 비효율이라거나,

극복해야 할 저항이라거나 하는.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마찰이 없다면, 에너지 손실은 0이 된다.

완벽한 효율이다.

하지만 동시에, 운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역설이다.

마찰은 운동을 방해하면서, 동시에 운동을 가능하게 만든다.


저항이면서, 동시에 운동의 조건이 된다.

비효율이면서, 동시에 조절의 수단이 된다.


마찰력은 두 표면이 접촉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크기는

표면의 거칠기와 접촉면을 누르는 힘의 크기로 결정된다.


마찰력은 마찰계수와 수직항력을 곱한 값으로 나타낸다.

마찰계수는 표면의 거친 정도를 나타내고,

수직항력은 두 표면이 서로를 얼마나 강하게 밀어내는가를 나타낸다.


유리판 위의 얼음은 마찰계수가 작다.

매끄럽고, 마찰이 작다.


고무 타이어와 아스팔트는 마찰계수가 크다.

거칠고, 마찰이 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찰은 표면의 물리적 성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표면이라도,

접촉면의 방향에 따라 마찰이 달라진다.


나뭇결을 따라 밀 때와 나뭇결을 거슬러 밀 때는,

같은 나무지만, 마찰력의 크기가 다르다.


사람도 그렇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보는가에 따라,

AI와의 마찰 정도가 달라진다.


시야가 표면을 만든다.

그리고 그 표면이 마찰의 정도를 결정한다.


속도의 시야

세상을 '속도'의 시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빠른 것이 좋은 것이고, 느린 것은 뒤처진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 '속도'의 시야는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 세상을 지배했다.

증기기관이 말보다 빠르고,

전기가 촛불보다 밝으며,

인터넷이 편지보다 빠르다.

그리고 결국 빠른 쪽이 승리자가 된다.


빠르게 전환한 사람들이 이 시야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AI는 기회다.


더 빠르게 일할 수 있고,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으며,

더 높은 효율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빠르게 움직인다.


디지털 전환에서

'문화 변화에 투자한 조직'은 그렇지 않은 조직보다

다섯 배 이상 높은 성공률을 보였다.


그들의 정체성은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정체성 안에서, AI는 자연스럽고,

그들에게 AI와의 접촉면은 매끄럽다.

같은 방향이기에 마찰이 작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속도의 시야를 가지지는 않는다.


과정의 시야

1986년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광장에 맥도날드가 들어섰다.

주문 후 15분 안에 먹을 수 있는 햄버거가 등장했다.


빨랐고, 저렴했고,

무엇보다 맛과 품질이 일정했다.

산업혁명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Carlo Petrini의 시야는 달랐다.

그는 음식을 단순히 영양만을 공급하는 물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음식은 관계 형성 과정이었고,

정을 나누는 시간이었으며,

마음을 담은 손길이었다.


하지만, 15분 만에 완성되는 햄버거에는 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표준화된 재료,

기계화된 조리 과정,

최적화된 동선 속엔

효율은 있지만, 과정은 없었다.


어떠한 정성을 담아 키워져 만들어진 고기인지,

어떤 계절의 햇살이 담긴 채소인지,

어떠한 마음의 손길을 담아 만들어진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지워져 있다.


Petrini가 시작한 슬로우 푸드 운동은 단순한 패스트푸드 반대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관의 선언이었고,

'과정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었다.


저녁 식단에 올라온 한 접시 파스타는

밭에서 토마토를 키우는 농부의 정성과

햇살과 비를 뿌려준 자연의 따스함과

씨를 빼고, 껍질을 벗기고, 천천히 졸이는

요리사의 정성을 담은 시간이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파스타를 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아

자신들의 하루를 나누며 먹는다.


그 파스타에는

농부의 계절이, 요리사의 경험이,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다.


30분의 식사 시간은 단순한 영양섭취 시간이 아니다.

관계를 확인하고,

시간을 음미하며,

과정을 존중하는 시간이다.

과정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닌, 함께하는 여정이다.

결과물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속도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과 과정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게

AI는 어떤 모습일까?


보고서를 쓰는 30분.

속도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30분은 단순한 문서 작업 시간이다.

정보를 정리하고, 문장을 다듬고, 형식을 맞추는 과정이다.

이 30분을 10분으로 줄여준 AI는 효율을 높여준 훌륭한 동료가 된다.


하지만 과정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30분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보고서를 쓰는 동안 그들은 생각을 정리한다.

어떤 논리가 약한지, 어떤 개념이 불명확한 지,

전체 구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고민하고,

작성하는 과정에서, 사유가 깊어진다.


이들에게 AI는 사유의 과정을 빼앗아 가는 존재가 된다.

결과물은 나오지만, 그것은 물리적 시간을 얻는 동시에 사유의 시간을 잃는 거래가 된다.


속도와 과정이 교환되고,

효율과 의미가 교환되고,

결과물과 성장을 맞바꾼다.

그리고, 과정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은 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과정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과정 자체가 의미이자 목적이다.


Cal Newport의 『디지털 미니멀리즘』은 이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책에서 그는 기술을 의도적으로 최소화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소셜 미디어를 끊고, 스마트폰 사용을 줄이며, 깊은 집중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 도구가 내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가?'라고 묻는다.


또한,

'더 빠른 답변, 더 많은 생산,

더 효율적인 작업을 하게 된다고 한들,

남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과정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게

속도를 얻고 깊이를 잃는 것은, 거래를 성립시킬 만한 가치가 없다.


관계의 시야

아미시 공동체는 과정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 보다

좀 더 근본적인 시야를 가진다.


사람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이웃과, 가족과,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 속에 있고,

그 관계가 나라는 존재를 완성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관계의 그물'로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가치관이 아니다.

존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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