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ergy of Distrust
⚠️ 이 글의 성격에 대한 안내 이 시리즈는 정답을 선언하는 글이 아닌, 변화하는 세계와 함께 조금씩 다듬어가는 사유의 기록입니다. 데이터와 연구가 축적되거나, 이후 편에서 더 깊은 맥락이 드러나면 일부 내용은 수정되거나 재구성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류가 아닌, 더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완성본'이 아닌 '진행 중인 사유'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947년 8월, 영국이 인도 아대륙을 떠났다.
200년간의 지배가 끝났지만 그 땅은 하나로 남지 않았다.
영국 변호사 시릴 래드클리프가 5주 만에 그은 선 하나가 그 땅을 둘로 갈랐다.
그는 인도에 가본 적이 없었다.
런던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지도 위에 선을 그었을 뿐이다.
기준은 단순했다.
힌두교도가 많은 지역은 인도, 무슬림이 많은 지역은 파키스탄.
종교 인구 비율로 국경을 정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인도나 파키스탄이 아닌 영국이 만든 것이었다.
1871년, 영국은 인도에서 첫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항목 중 하나가 종교였다.
힌두, 무슬림, 시크, 불교, 기독교로 개인에게 종교를 묻고 기록하고 분류했다.
그 전까지 종교는 개인의 신앙이었다.
같은 마을에 힌두 사원과 모스크가 나란히 있었고,
축제 때는 서로를 초대했으며, 장터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물건을 사고팔았다.
물론 그들의 삶에 차이는 있었다.
기도하는 방식이 달랐고, 먹지 않는 음식이 달랐으며, 명절이 달랐다.
하지만 그 차이는 개인의 선택이었을 뿐 집단의 경계는 아니었다.
영국은 그 차이를 경계로 만들었다.
행정 구역을 종교로 나눴고, 공직 할당을 종교 비율로 했으며, 선거구를 종교로 구분했다.
투표권도 종교에 따라 달리 부여했고, 법정에서도 힌두법과 이슬람법을 따로 적용했다.
처음엔 행정적 편의가 목적이었다.
방대한 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분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70년이 지나자 분류는 정체성이 되었다.
나는 힌두교도다라는 문장이 나는 무슬림과 다르다는 의미로 바뀌었고,
나는 무슬림이다라는 문장이 나는 힌두와 함께 살 수 없다는 확신이 되었다.
1940년대 들어 독립 운동이 거세졌다.
영국은 떠나기로 했다.
힌두 주도의 국민회의파는 하나의 인도를 원했다.
무슬림 주도의 무슬림연맹은 별도의 국가를 요구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힌두와 무슬림은 두 개의 민족이며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반대했다.
우리는 수백 년간 함께 살았고 종교가 국경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영국은 진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분리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분열을 남겼고,
제국의 영향력이 오래 남는 조건과도 겹쳤다.
래드클리프가 선을 그었다.
5주 만에 4천 킬로미터가 넘는 국경선을 현장 조사도 없이 그었다.
마을을 나누고, 강을 나누고, 관개 시설을 나누고, 철도를 나눴다.
어떤 마을은 한가운데로 선이 지나갔다.
어제까지 같은 마을이었는데 오늘은 절반은 인도, 절반은 파키스탄이었다.
문제는 사람들이었다.
인도 땅에 수백만 무슬림이 살고 있었고, 파키스탄 땅에 수백만 힌두가 살고 있었다.
수백 년간 그곳이 고향이었던 사람들이었다.
조상의 묘가 있고, 농지가 있고, 가게가 있고, 친구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쪽에 있다는 이유로 선택해야 했다.
떠날지, 위험을 감수하고 떠날 지 선택해야만 했다.
1,000만 명에서 2,000만 명이 움직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인구 이동이었다.
파키스탄 쪽 힌두들은 걸어서, 소달구지에 실려서, 기차를 타고 인도로 향했다.
인도 쪽 무슬림들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길에서 만났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행렬이었다.
어떤 이들은 손을 흔들었고, 어떤 이들은 돌을 던졌다.
폭력이 시작되었다.
인도 쪽에서 힌두 민병대가 무슬림 행렬을 습격했다.
파키스탄 쪽에서 무슬림 민병대가 힌두 행렬을 공격했다.
보복이 보복을 낳았다.
저쪽에서 우리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쪽에서 보복했고,
그 소식이 다시 건너가면 또 보복이 일어났다.
기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그런데,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모두가 죽어 있었다.
반대편에서 출발한 기차도 마찬가지였다.
시체를 가득 실은 기차가 양쪽을 오갔다.
마을 전체가 불탔고, 우물에 시신이 가득 차서 물을 길을 수 없었다.
강에 시신이 떠내려왔고, 그 수는 하류에서 건질 수 없을 정도였다.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너무 많았고, 너무 빨랐으며, 기록할 여유가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나중에 추정했다.
10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라고 했지만 그것도 추정일 뿐이다.
어떤 마을은 통째로 사라졌다.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70년 전만 해도 같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이 함께 놀았고,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팔았으며,
결혼식과 장례식에 서로를 초대했던 사람들이었다.
종교가 달랐던 것은 어제도, 그제도, 100년 전에도 같았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던 것일까?
영국이 만든 구분이 정체성이 되었다.
행정적 분류가 존재론적 차이로 바뀌었다.
나는 힌두다는 신앙 고백이 나는 무슬림이 아니다는 배제의 선언이 되었다.
나는 무슬림이다는 정체성이 나는 힌두와 함께 살 수 없다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여 서로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사라졌다.
우리는 다르지만 함께 살 수 있다는 전제가 깨졌다.
너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피가 흘렀다.
77년이 지났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여전히 적대 관계다.
네 차례 전쟁을 치렀다.
1947년, 1965년, 1971년, 1999년에 양국은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카슈미르 국경에서는 총성이 그치지 않는다.
양국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서로를 겨냥하고 있다.
2024년 현재도 긴장은 계속된다.
국경 분쟁, 테러 공격, 외교 단절이 반복된다.
왜 끝나지 않을까?
1947년 8월에 시작된 불인정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확신이 한 번 만들어지자 스스로를 강화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역시 저들은 적이다라는 증거가 되고,
그 증거는 다음 갈등을 정당화하며, 갈등은 다시 확신을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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