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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최늘샘 Mar 31. 2018

21세기 마도로스

군산에서 만난 선원의 이야기

사고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다 취급하지요. 배로 안 나르는 상품은 없어요.
심지어 농축 우라늄을 실어나른 적도 있는데요.
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 선원 허재욱 님

  긴 항해를 마친 마도로스가 군산에 상륙했다.

  서천에서 태어난 허재욱 씨는 목포 해양대학교를 졸업한 후 십 년 넘게 대형 선박 자동화 엔지니어로 일해 왔다. “상선, 원목선, 유조선, LPG선” 등 다양한 배를 타며, “정박했던 나라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세계의 바다 곳곳을 떠돌았다.


  허재욱 씨와 동료들이 움직이는 길이 백 미터에서 이백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배들은 한국에서 세계 도처로 수출되고 세계 도처에서 한국으로 수입되는, 세계화 시대의 수만 가지 상품들을 운반한다.


  “야채나 꽃, 과일, 옷 같은 일상적인 생활 상품부터, 건축용 나무나 석유 같은 천연자원까지, 사고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다 취급하지요. 배로 안 나르는 상품이 없다고 봐야지요.”


  컨테이너를 싣고 다니는 상선의 경우에는 선원들에게 컨테이너에 담긴 내용물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한번은 배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이 나와서 화물 운반을 관리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컨테이너들 속에 농축 우라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용물에 대해 알려주지도 않거니와 어떤 물건이 들었든지 간에 선원들은 바다를 건너 무사히 주어진 물건을 목적지로 가져다 주어야 한다.   


  배의 크기는 거대하지만 자동화된 기계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선원의 수는 스무 명 남짓이다. 선원은 해양대학교 선후배들이 많고, 간혹 해양수산연수원 출신도 있다. 업계가 크지 않고 학연(學緣)이 많이 작용하는 직종이다.

  2000년에 처음 배를 탈 당시에는 월급이 150에서 200만 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맡고 있는 직책에서 더 진급할 직급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고, 월급은 처음보다 네 배 가량 올랐다.

  10개월이나 12개월씩 배를 타야하는 대신에 한번 상륙하면 한꺼번에 100일 정도의 긴 휴가를 받는다.


  “휴가는 길어서 좋은데 끝나면 또 오랫동안 가족도 못 보고 친구도 못 보고, 사회랑 떨어져서 생활하니까요, 그 과정이 계속 반복이 된다는 게 제일 힘든 점이에요. 나이도 먹었고 결혼은 하고 싶은데, 휴가 때 소개팅으로 만나서 사귀게 돼도 좀 알게 될 때쯤 다시 바다로 나가야 되고, 그러다가 몇 번을 헤어졌어요. 많이 안타까웠죠... 그래도 예전보나는 상황이 나아진 거예요. 요즘은 먼 바다에서도 전화랑 인터넷은 쓸 수 있게 됐으니까 많이 좋아진 거지요.”


  한 달에 900만 원 가까이 번다니. 그야말로 ‘88만원 세대’, 이년간 월급 80만 원을 받으며 첫 직장을 다닌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돈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갯바람을 맞으며 자란 나에게는 먼 바다의 선원, 마도로스에 대한 낭만이 있다.

  알랭 들롱이 파란 지중해에서 요트를 조종하는 장면이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 같은 영화 이미지들도 그런 낭만을 키우는 데 일조했던 것 같다. 수많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바다로 떠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바다는 육지의 따분한 일상을 벗어나는 모험과 미지의 공간으로 상상된다. 1997년부터 연재되고 있는 만화 <원피스>의 루피도 “나는 해적왕이 될 거야!”라고 외치며 꿈과 보물을 찾아 항해하고 있지 않은가.

  군산버스터미널 주변의 인력 사무소들에는 ‘선원 구함’ 광고가 붙어 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도시의 공장이나 농촌뿐만 아니라 어업계에서도 일하고 있고, 대부분 열악한, 혹은 끔찍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도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조건도 어렵지만, 농촌과 어촌은 노동 기본권의 적용과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보호가 더욱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멋모르는 내 상상 속 모험과 낭만의 바다와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시대 바다 노동의 현실일 것이다.


  지구 각지에서 생산되는 모든 상품들과 노동자들이 나라와 나라를 오가는 세계화 시대. 세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엄청난 이윤과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 밑바닥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착취와 고통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 잘 생각하고 살지 못하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 입는 옷, 소비하는 생활용품 대부분은 세계 각지의 자원과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어느 날엔가 과일 주스를 마시고 원재료 및 함량 표시에 적힌 다양한 나라 이름을 보다가 쓰게 된 시를 한 편 남긴다.



주스 캔 속의 세계 


240밀리리터

주스 캔 속에는  


탄자니아 과일 농장

어린 소녀의 저임금 노동이

10%


인도네시아 알루미늄 공장

세척용 화학 약품으로 병든

원주민들의 아픔이 7.4%


컨테이너 화물선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하는

선원들의 고독이 3.6%


함유되어 있습니다


성분 표기를 읽은 후에

달콤하게

섭취하십시오


240밀리리터

주스 캔 속에는  



*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필자는 한 명의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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