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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최늘샘 Apr 02. 2018

혼자, 나 혼자 살고 있네

군산시 장미동 산책자 이야기

"아는 사람이 따로 있간?!
그냥 오다 가다 만나는 거제."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 진포해양테마공원 산책자 이영철 님

  살며시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 군산 내항(內港) 갯냄새가 달큰하게 섞여들었다. 청바지에 목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를 입고 가죽 챙모자를 쓴 이영철 할아버지가 조금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항구 한쪽에 조성된 해양테마공원의 구경거리들을 안내해 주었다.    


  군산 토박이인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한국합판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 시절에 다친 왼손의 상처가 아직도 선명하다. 공장에서 다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처음엔 너무 아팠지만 “숱하게 다치니까...” 아픔도 무뎌졌다.


  “당시에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제일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떠나고, 죽어버리고, 아무도 없어...”


  시중에 알루미늄이 많아지는 시절이 오자 그 많았던 제재소들도 다 문을 닫고 사라졌다. 15세기 후반 영국에서 양이 농민들을 몰아냈듯, 20세기 후반 군산에서는 알루미늄의 대중화가 나무 공장과 노동자들을 몰아낸 것이다. 알루미늄이 사람을 잡아먹다니...  


  요즘은 일거리가 별로 없어서 하굿둑이나 해양공원에 나와 산책을 하고, 구(久)역전 재래시장 앞 정자나무 아래서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낸다.


  “아는 사람이 따로 있간?! 그냥 오다 가다 만나는 거제.”

  만날 약속을 하지 않아도, 나이 차이가 나도, 오다가다가 만나서 서로의 얘기를 나누다보면 아는 사람이 되고, 친구가 된다. 정자나무 아래서는 내기 윷놀이 판이 벌어지곤 하는데, 개중에는 “감방을 들락날락 하던” 사람들도 몇몇 있다.         

  전주에서 처음 만나 결혼한 부인은 혈압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서 여기저기서 중신해줄 테니까 (장가)가라고들 하는데, 그게, 참,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어... 그러니까 그냥 게속... 참... 나 혼자 살고 있네... 나 혼자... 한번은 하나 어디서 샀는디, 당장 아프다고, 몸이 아프다고 해서, 가라, 오지 말라 했지...”


  이 개명(開明)의 시대에 같이 살 사람을 샀다니, 돈을 주고 샀다는 말인지 무슨 말인지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할아버지가 슬픈 분위기가 되기도 했고, 워낙 방언도 많이 쓰셔서 일일이 말씀을 끊고 여쭈기가 어려웠다.  


  “사람이 몸이 첫째여. 아프면 본인이 먼저 서둘러서 병원에 가고, 계속 운동을 해야 돼. 또 한 번은 누가 중국 사람을 (중매)해준뎠는디 내가 그냥 싫다고 혔어... 순 저 거시기한, 좀 까진 사람은  돈만 바라고 돈 떨어지면 또 가버리고, 지금 세상은 그런께로...”

  이래저래 만나려고 노력을 해 보아도 같이 살 사람을 만나기가 너무 어렵다.        


  “이제 시안('겨울'의 전라북도 방언)이 다 지나갔나... 나가 개나리아파트에 사는디, 처음에 이사 왔던 때에는, 멋모르고 보일러를 렸더니 가스요금이 겁나게 나와 버렸어. 그 뒤로는 시안이면 옥돌장판만 펴고 자. 그것도 초저녁만 지나면, 꺼버려. 전기세도 아끼고, 세게 틀고 자면 전기 때문에 피가 마른디야... 자기 전에 좀 틀었다가, 위에 이불 두텁게 깔고 자면 좋아, 딱 자기 좋은 온도야.”  

  할아버지의 자전거 안장 밑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하얀, 아니 한 때 하얀색이었던 거뭇거뭇 때가 탄 토끼 인형이 끼워져 있다. 누가 내다 버린 걸 할아버지가 주워와 안장 밑에 끼워 다니며 기름이나 먼지를 닦는데 쓴다고 했다.


  눈살을 찌푸린 표정으로 재봉된 토끼 인형이었지만 할아버지의 개성적인 재활용이 썩 싫지는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토끼의 통통한 뒤통수로 쓱싹 안장을 한 번 훔치고 앉은 뒤, 할아버지는 다음 코스인 구역전 정자나무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담는 필자는 한 명의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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