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도 있구 고생도 많이 했구

충남 청양군 칠갑산 황소집민박·황소식당 이야기

by 유최늘샘
시방 가만... 생각하면
재미도 있구, 고생도 많이 했구...
4.칠갑.백기희.jpg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칠갑산 황소집민박·황소식당 백기희 님

七岬

칠갑산은 백제의 진산*(鎭山)으로 제천의식이 행해졌으며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을 뜻하는 칠(七)자와 십간(十干)의 첫째 천간인 갑(甲)자를 쓴 이름을 갖고 있는 영산(靈山)이다.


천안버스터미널에서 행선지 안내표를 보다가 방향과 차비가 적당하고 지명이 예쁜 ‘유구 (維鳩)’라는 곳을 골라 차표를 샀다. 유구터미널에서부터는 옛 노래**로만 들었던 칠갑산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2차선 도로에 인도는 따로 없었지만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걷기 좋았다. 밤이 되어도 칠갑산은 멀기만 해서 히치하이킹을 했을 때, 차를 태워준 사람은 33살 청년 두쾌 형. 대학교에서 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리고 싶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지금은 포클레인 운전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종일 건축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이었다. 덕분으로 걸을 땐 까마득했던 칠갑산 입구에 순식간에 가닿았다.


대치리 한치고개 아래 마을회관에서 하늘색 ‘화투용 담요’를 덮고 고요한 밤을 지내면서, 나그네를 호의로 맞아주는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이 마법처럼 신기하고 감사했다. 세계에 몸을 맡기고 이 여행을 끝까지 이어나가자고 다짐했다. 살아오면서 세상이 너무 비정하고 차가웠던 적이 많았는데, 또한 바로 그 세상이 이같이 다정하고 따뜻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잊고 살던 사람들이 떠오르며, 혼자지만 혼자가 아닐 때가 있다. 절망을 건너가게 해주는 삶의 의지에 감사하다.

서산으로 지는 달빛, 동트는 햇살 속에서 진달래, 멧새, 다람쥐들과 함께 칠갑산의 아침을 맞고 장곡리로 내려오다가, 복돌이와 진돌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 황소집 민박·식당의 주인 백기희 할머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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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긴 부여군에서 태어났어. 열일곱 먹던 해에 저-기 산 너머로 걸어서 왔지. 그땐 시집두 걸어서 왔어. 그렇게 와 가지구선 여기 마당에서 제지내구 혼인하구, 그렇게 살았지 뭐... 시방 가만... 생각하면 재미도 있구, 고생도 많이 했구...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모시며 시동생들을 키웠던 시절에는, “칠갑산 밑에서 숯 구워다가 팔아서 한 말, 한 말 곡식을 팔아(사다) 먹고”살았다. “죽은 지 형 대신 큰아들 노릇을 하는 둘째 아들이 서울서 회사 다니다 내려와서” 황소민박집 옆 황소식당을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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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도와주고 해서 장사는 잘 돼. 낮에는 그냥저냥 일하면서 사는데, 저녁 되면 외롭고 서글프지. 먼저 간 자식들 생각 나니까..."

“장사는 삼십 먹었을 때부터 했시유.” 동네에 가겟집이 구멍가게 몇 개밖에 없던 시절 동네에 처음 생긴 식당이었다. “전기 처음 들어왔을 때, 그때가 몇 년도여... 그 왜 딸래미, 박... 박근혜, 그 아버지가 대통령 할 때부텀 했어. 여기 일차선 도로 놓고, 이차선 도로 놓을 때도 내가 밥 해 줬지, 저기 까치네 들어가는 다리 놓을 때도 공사하는 사람들 다 내가 해 줬어.”


민박집에는 단골손님이 많다. “장곡사 스님이 소개해서 보내 준, 고시 공부하러 왔던 학생들 중에 성공했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등산 왔다가 먹을 거 사들고 디다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또 결혼한다고 오라 그래서 서울꺼정도 갔다 왔어... 서울은 생전 가 봤남? 그랬어도 오라 그러니께 갔지.”

내가 46년간 밥 해주고 민박집 하면서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쁘다고 생각했던 손님은, 서넛밖에는 없었던 것 같어. 혼자 농사만 짓고 우두커니 앉았으면 외로울 거여. 하던 장사니께 계속하고 있으면 손님들이 또 찾아오니까 반갑고, 같이 웃고, 그런 게 즐겁지.”


“자손을 그렇게 버리고 나니까 머릿속이 비워졌어. 이제 바라는 건 뭐, 시국이 조용하고, 자손들, 젊은 사람들 아프지 말고, 나 이제 갈 때 자다가 조용하게 가구. 그거 밖에 없어. 그 맘 없는 노인네들은 없어...


이야기를 다 듣고나니 점심시간이었다. 둘째 아들 내외가 운영하는 황소집식당에 들어가 할머니가 매일 새벽 직접 만드는 손두부를 넣은 찌개 정식을 먹었다. 굽이굽이 기구한 인생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따뜻하고 소박한 정을 나누며 살아온 할머니의 세월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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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 조선시대에는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묘향산, 북쪽의 백두산, 중심의 삼각산(북한산)을 오악(五嶽)이라고 하여 주산으로 삼았다.

** <칠갑산>, 1979년 조운파 작사, 작곡. 윤희상이 부른 원곡을 1989년 주병선이 리메이크하며 유행했다.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가난한 어머니와 부잣집 민며느리로 시집가는 딸의 이별을 담고 있다.

4.황소집1.jpg 할머니의 장독들

*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필자는 한 보잘 것 없는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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