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군 장곡리 정자민박∙슈퍼 이야기
그저 여태까지 내가 스스로 노력하고 살아서,
밥 안 굶고,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게, 좋다면 좋은 일이지...
靑陽
청양은 산이 푸르고 볕이 좋은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다. 백제 때는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 신라 때는 청무(靑武)로 불리다 고려 초부터 청양으로 불리게 되었다.
황소집 손두부 정식을 먹고 장곡리를 내려오다가 작은 초등학교를 만났다. 돌로 만든 오래된 미끄럼틀과 녹슨 정글짐이 떠난 아이들을 기다리고, 운동장 가운데에도 듬성 듬성 풀이 자라고 있는 있는 적막한 폐교였다. 농민들이 많이 살던 한때는 교실과 운동장이 시끌씨끌했을 텐데 인구가 줄면서 대치면 소재지 수정초등학교 칠갑분교가 되고, 결국 문을 닫았다. 학교를 둘러보고 개울을 따라 나오는데, 마을 정자나무 아래의 가게 앞에 앉아 하염없이 길을 바라보고 있던 장곡고랑 토박이 김갑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차가 별로 없어서 관광객들이 칠갑산에 오면 민박을 자주 했는데, 지금은 자가용 타고 와서 잠시 둘러보고 가 버리는 동네라 민박하는 사람이 적지. 그리고 새로, 현대식으로 지은 펜션이 여기저기 많아져 가지고, 요새 사람들이 우리 집같이 온수도 안 나오는 옛날 집에 잘 오려고 하지 않지...”
“자식은 아들이 다섯이 있는데 뭐 다 객지로 나가 버리고, 아내하고 둘이서 여기 민박이랑 슈퍼 운영하고, 두 늙은이 먹을 만치만, 농사도 짓고 있어.”
“그렇지. 나는 여기서 나서 오늘날까지 살았지. 젊은 시절에는... 이 고랑을 나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나가서 살 집도 없고, 뭘 해서 먹고 살 게 없잖애...” 그래서 떠가지 못하고 74년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아왔다.
“부모님들도 큰 농토가 없었기 때문에... 스무 살 될까 말까 하던 시절에는, 산에 밥 싸 갖고 다니면서 산판(山坂, 나무를 찍어 내는 일판) 일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그때가 제-일, 고생이 심했지...” 산판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나는 몇 번이고 물어보고 나서야 ‘나무꾼 같은 건가?’ 하고 조금은 이해를 했다. 내 상식과 경험대로 톱으로 나무를 베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때는 톱이 없지. 도치(도끼)로 나무 찍어서 베는 거야.” 수십 년 전이니까 전기톱은 당연히 없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냥 톱도 없었던 시절이, 그리 먼 옛날 얘기가 아니라니 신기했다. 지금은 너무 사소하고 간단하게 느껴지는 한낱 톱이라는 도구 하나도, 근대화 시기를 지나며 보편화된 신문물이었던 것일까. 어릴 때 산판에서 도끼로 나무를 찍으며 먹고살았던 갑수 할아버지에게 이 첨단 테크놀로지의 세상은 얼마나 많이 변해온 것인지, 상상해 보자니 아찔하다.
할아버지가 스물한 살 때, 같은 마을에 살던 열일곱 살 동네 여성과 결혼을 했다. 지난한 인생을 돌아보자면 특별히 좋았던 기억이 없다. “그저 여태까지 내가 스스로 노력하고 살아서, 밥 안 굶고,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게, 좋다면 좋은 일이지...”
“꿈이나 소망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고, 앞으로 무엇을 연구해서 더 해보겠다, 하기에는 능력이 없고 힘이 없지... 사는 날까지 그냥, 살고 간다는 마음으로 사는 거지. 뭐, 구십 살, 백 살 사는 양반들도 끼정끼정하니 정정한데, 그런 양반들한테 대면 우리는 아주 애들인데, 그것도 기질을 타고나기를 잘 타고나야 되는 거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힘들지.”
선선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떳떳하게 살아왔다는 자부심과 시간의 무상함, 늙어감에 따르는 체념이 전해졌다. 매끄럽게 빗어 올린 고운 백발 위에 오후의 봄 햇살이 내린다. 건설회사 마크가 박힌 점퍼를 입고 정자민박 마당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할아버지는 오래되고 깊은 시선으로 떠나가는 여행자의 발길을 배웅해 주신다.
* <남한사람들>은 네 번째 여행지 보령시 웅천읍으로 이어집니다.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필자는 한 보잘 것 없는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