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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최늘샘 Mar 28. 2018

쑥 뜯는 사람들

충남 보령시 웅천읍 황교리 광암골의 봄

사회의 약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질지 않은’ 세월,
두부 한 모, 카스텔라 한 조각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온기가 있는 사회가
할머니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시국의 조용함’은 아닐까. 
그것은 결국 평화로움을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熊川

웅천이라는 지명은 이 일대를 흐르는 산줄기의 모양이 풍수지리에 비추어 보면 곰의 형국이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또는 웅천을 상징하는 웅천천이 일명 '곰내', '한내', '대천'이라 변천되어 오는 과정에서 웅천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동안 말로만 듣고 가보지는 못했던 대천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에 앉아 황해의 파도소리를 한참 듣다가 또다시 저녁이 오고, 독산해변 교회의 문을 두드려 하룻밤 신세를 졌다. 감사 편지를 남기고 아침 일찍 나서서 몇 리를 걸어가는데, 목사님이 자전거를 타고 나와 꼭 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잡았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멘. 

처음 가본 대천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

  그리고 점심나절까지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는 웅천의 들길을 걸었다. 땅 밑에서 나온 배고픈 두더지가 먹이를 찾아 헤매고, 민들레의 새파란 잎사귀에 빨간 무당벌레가 날아와 앉았다. 띄엄띄엄 경운기와 쟁기로 논과 밭을 갈아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이 있었고, 멀리 봄 쑥을 뜯는 세 사람이 보였다. 


  “걸어서 다니면 배 많이 고프지. 총각, 먹을 복이 있네. 얼른 이리와서 앉아.” 하며 새참을 나눠주셨다. 소금으로 조미한 네모난 김에다가 한입 크기로 자른 카스텔라 빵과 달걀을 싸서 드시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생전 처음 보는 음식 궁합이었는데, 그렇게 먹으면 맛있게 잘 넘어간다며 권하셔서 따라 먹어 보니 과연 색다르고 맛있었다. 맛있고 새로운 음식은 언제나 짜릿한 행복함을 준다.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보라색 썬캡을 쓴 곽영순 할머니는 세모시가 많이 나는 남쪽의 서천군 한산면에서, 햇살에 고운 얼굴이 탈세라 수건을 감아 쓴 김덕희 할머니는 북쪽의 안면도에서 웅천으로 시집을 온 뒤 웅천에서 평생을 살았다. 수줍어하는 소년의 느낌이 묻어나는 조용한 이병우 할아버지는 덕희 할머니의 남편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나온 푸릇푸릇한 새 쑥을 뜯으러 나란히 들판으로 나선 노부부가 참 따뜻하고 정겨워 보였다. 나도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와 함께 봄이 오면 함께 들판의 쑥을 뜯고, 쑥국을 끓여 나누어 먹으며 늙어 갈 수 있을까. 


  부부와 동행한 영순 할머니와는 어떻게 아는 관계일까. 

  “아, 우리들은 한 마을에서 한 삼십년을 알고 살았어.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 같은 것이 있냐고 여쭸더니, 신기하게도 칠갑산 황소집의 백기희 할머니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들은 이제 다 살았으니께, 그저 시국이 좀 조용-하고 자식들 잘 되기를 바라지, 뭐.황소집 할머니와 곽영순 할머니가 바라고 상상하는 ‘시국의 조용함’이란 어떤 것일까


  그들이 겪어온 ‘시국의 혼란과 시끄러움’은 대한민국의 다사다난했던 근대화 과정,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었을 시대의 아픔들과 닿아 있을 것이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작고 여린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회의 약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질지 않은’ 세월, 두부 한 모, 카스텔라 한 조각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온기가 있는 사회가 이 할머니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시국의 조용함’은 아닐까. 그것은 결국 평화로움을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그리고 그저 건강이 최고야. 오늘 이거 쑥 뜯은 걸로 쑥떡 해놓을 테니까 나중에 놀러 와. 여행 잘 해. 글쎄, 언제 또 인연이 닿으면 만날라나, 이 늙은이들. 하하하.” 


  쑥 뜯는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봄바람마냥 환하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렇게 따듯한 도움들로 여행을 이어나가는 나도, 앞으로 어느 때이건 카스텔라 한 조각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겠다, 다짐한다.  


*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필자는 한 명의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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