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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최늘샘 Mar 29. 2018

바닷마을 다섯 식구

충남 서천군 도둔리 이야기

농사일이나 바다일이나 기후 조건이 도와줘야 되는 일이라...
하늘에서 먹지 말라고 하면 못 먹는 거여.
하늘에서 먹으라고 해야 먹어...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도둔리  김정규 이수경 김새영 님

舒川

금강이 황해로 흘러드는 땅이며 냇물이 수려해서 서천이라 불리었다. 백제 때는 설림 또는 남양, 신라 때는 서림으로 불리다가 조선 초기 서천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대 후반, 김정규 아저씨가 열 살 무렵이던 때의 일이다. 서천 바닷가 마을 장벌부락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누나와 남동생들과 함께 소년은 살고 있었다. 어느 캄캄한 여름밤, 누군가 한적한 집에 다가와 도움을 청했다.

  우거진 수풀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불빛을 발견하고 찾아온 사람은 자전거로 전국을 여행 중인 대학생 누나였다. 동네사람들에게는 손바닥 같아서 헤매려야 헤맬 수 없는 작고 빤한 공간이지만, 홀로 지친 채 길 잃은 여행자에게는 무섭기가 광대한 심해와 같았을 것이다. 부부와 사남매는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다며 놀란 뒤에, 기꺼이 녹초가 된 여행자를 맞아 주었다.


  그 시절 소년에게는 ‘대학생’ 누나도 신기했고, 그 대학생 누나가 들고 온 사진기도 무척이나 신기했다. 따뜻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대학생 누나는 그 사진기로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다 찍어 주고는, 마당에 있던 개도 한 장 찍은 뒤, 나중에 현상하면 꼭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지난 밤 잃었던 길을 찾아, 다시 자전거를 저어 떠났다. 몇 달 뒤, 낯선 주소에서 보낸 작은 봉투가 도착했고, 그 속에는 그날 아침에 찍은 가족들의 사진이 곱게 담겨 있었다.

  30년의 세월이 지나고, 소년은 자라나 결혼을 하고,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어느 봄밤 집 앞 공터에서 검불을 태우며 서있는데, 그 불빛을 보고 웬 배낭을 멘 청년이 다가와 “저기 혹시, 바람 좀 피하고 갈 데가 있을까요? 창고 같은 곳이라도 괜찮은데...” 하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된 소년은 까맣게 잊고 있던 30년 전의 그 밤이 기억났다.  


  “나는 쓰리잡이여, 쓰리잡.”

  김정규 아저씨는 쓰리잡을 뛰고 있다. 서천화력발전소 직원이기도 하지만, 동생의 해태(김)사업과 아버지의 농사도 많은 품을 내어 도와주고 있다.


  가까운 동네에 살면서 알고 지내다가 아저씨와 결혼한 이수경 아주머니는 보험회사에 다닌다.

  “뭐, 생명보험, 손해보험, 다 하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영업하는 일이 뭐든 쉽지는 않지만, 보험은 더 힘들지... 자동차 세일즈나 뭐 그런 건 갖고 다니면서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이 있잖아. 근데 보험은 보이지 않는 상품을 파는 일이기 때문에 더 어려움이 있지. 위험에 대비해서 드는 게 보험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냥 ‘괜찮아, 나는 안 그럴 거야.’ 하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아요.”


  “저희 학교는 교장선생님이 여자예요. 그리고 전교생이 100명 이하예요.”

  삼 남매 중 둘째인 딸 새영이는 중학교 3학년이다. 재학 중인 서면중학교의 특색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직업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문직 쪽으로 일하고 싶어요, 전문직. 의류 쪽에 관심이 많아요. 쇼핑몰 CEO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친구들하고는 쉬는 시간이나 주말에 모여서 수다 떨고, 휴대폰으로 사진 찍으면서 놀아요.”  


  열두 살 막내 동준이는 친구들과 자전거도 타고 축구도 가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컴퓨터 게임을 제일 자주 하고 좋아한다. 아저씨가 동준이 만큼 어렸을 때는 여름이면 “둠벙”에서 헤엄을 치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썰매를 만들어 타거나 눈 덮인 산에서 꿩이나 비둘기를 잡아먹고 놀았는데,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이들의 놀이 문화는 너무나 바뀌었다.


  수경 아주머니가 어릴 때도 여름이면 동무들과 바닷물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을 정도여서, 외할머니가 매번 점심밥을 바다로 날라다 주곤 했다고 한다. 요즘은 바닷가에 살아도 수영을 못하는 애들이 많다. 어릴 때부터 다들 학원에 다니느라 바쁘다. 안타까운 일이다.  


  “애들이 공부를 좀 잘 해서, 편안한 일까지는 아니래도, 최소한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는 않고, 좀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하지. 요새 사회가 너무 어렵잖아요.”       


  “주변 사람들이 다들 돈도 잘 벌고 여유를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잘 사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 다수가 어렵게 살고 있지...”

  “시대는 발달하는데 사는 건 오히려 점점 더 어려워져.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급여가 그에 맞춰서 올라 가냐 하면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급여 수준은 삭감이 되고, 동결이 돼... 그리고 이상 기온으로 인해서 수산물과 농작물의 수확률도 계속 떨어져요. 농사일이나 바다일이나 기후 조건이 도와줘야 되는 일이라... 하늘에서 먹지 말라고 하면 못 먹는 거여. 하늘에서 먹으라고 해야 먹어... 허허...”


  맞벌이를 하며 바쁘게 살고 있고, “도시에서 사는 거에 비하면 자식들 사교육비도 덜 들어가는 편이지만” 힘이 많이 들고, 상황이 나아질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긴 얘기를 나누는 동안 텔레비전에선 저녁 드라마와 아홉 시 뉴스가 끝났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쁘고 고민 많은 고3 수험생들‘ 중 한 명인 큰아들 진솔이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세찬 밤바람만 피할 수 있는 창고 같은 곳이면 족했는데, 장벌부락 가족들은 나에게 진솔이의 방을 요즘에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기꺼이 내어 주었다. 만화 <개구리 하사 캐로로>와 <포켓몬스터>의 스티커와 문제집들로 가득한 방에서, 나는 추위와 피로를 완전히 잊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밤에는 어디쯤에서 또 따뜻하고 행복한 밤을 보낼 수 있을까, 다시 춥고 쓸쓸한 밤을 보내게 될까?



* <남한사람들>은 여섯 번째 여행지 군산으로 이어집니다.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필자는 한 명의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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