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가 원하는 만큼 우울해볼게요

네가 원한다면 지구 바닥 끝 11,092m의 마리아나 해구라도 갈게

by 는개

우울이는 제게 항상 절 휘말리게 만드는 허리케인 같은 것이었어요.

우울이만 오면 저 스스로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게 제어도 안되고 이해도 안 됐어요.

상처받은 상황들과 상처 준 사람들이 계속 귀신처럼 붙어서 자꾸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그때마다 술 마시다, 통곡하다, 손톱이 다 부러지도록 바닥을 긁어대다, 몸에 칼집을 내고 피를 보다...


우울이도 우울이 나름대로 사정이 있고,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나조차 너무 지겨운걸요.

아프고 고통스러운 건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데 오래 겪은, 아는 아픔과 아는 고통이어서 그런가 그것 조차도 지겨워요.


첫 번째 치료 때 연습한 대로 낮에는 약을 과다하게 먹으며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결국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소리 없이 울었어요. 우울이가 하루 종일 곁에 있어서, 나를 온통 차지하면 온몸이 무감각하고, 계속 눈물을 쏟고, 왜 사는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면서 저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요. 그러다 수면제 몇 알 삼키고 침대에 누워요. 베개가 흠뻑 젖도록 우울이와 함께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괜찮아져요.


한동안 약으로 순간순간을 우울이가 조금도 삐져나오지 않게 꾹꾹 누르면서 살았어요. 모든 감정이 없어지고, 모든 게 무의미해지고, 의지와 의욕, 기본적인 욕구까지 모두 다 없어진 기분으로 몇 날 며칠을, 몇 주 몇 달, 몇 년을.


하지만 재치료 시작 이후,

우울이가 마음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 그 뒤로 우울이를 대하는 제 태도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어요.

우울이는 결국 내 마음 중 하나라 언제나 곁에 있을 거고, 그때그때 우울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아프지 않으면 절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니 우울이가 원하는 만큼 나를 우울에 가득 저며 완전히 잠겨야겠구나. 우울이가 몰아치는 대로 끝까지 가야겠구나.


우울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래도 우울이가 있어서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안 것도 있거든요.

저에게 우울이는 늘 버거웠지만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하죠? 나보다 나를 감정이 더 좋아한다니.

말이 안 되는 말이잖아요.

근데 그럴 수도 있겠더라고요.



비냄새, 겨울바람 냄새.

빗소리, 빗방울이 붙은 창문

는개, 안개비, 해무 같은 예쁜 비들.

습한 공기 속의 뜨거운 커피 향기


채도 낮은 도시와 너무 고운 회색빛 하늘.

전 세계 어디든 같은 톤으로 물들이는 마법 같은 흐림.

그 차분하고 침착한 흐린 날.


엔프피를 사람으로 형상한다면 이럴지도 모르는,

너무 쨍하고 해가 따가울 정도로 덥고 밝은,

안 보이는 것이 없을 것 같은 숨기는 것 없이 맑은 날 보다

언제나 되고 싶었던,

인프제를 사람으로 형상한다면 이럴지도 모르는,

차분하고, 보면 볼수록 안 보이던 게 보일 것 같은 사람 같은 흐린 날이

솔직히 다니기는 훨씬 좋은 걸요.


우울이는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계속 생각해보다 보니 우울이가 알게 해 준 것들로 마음속에 파도가 치네요.


내 마음 우울이,

네가 원한다면 그 끝이 심해 속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라도,

그 8,000m보다 더 내려간 11,092m의 챌린지 해연이라도 갈 거야.

그 끝이 어디든 같이 가보자. 갈 때까지.

끝까지 가서 바닥을 치면,

혹시 네가 나에게 서운했던 것들도 알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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