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조아름 2019-2020 두 번째
나에겐 한의사였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간질과 부인병을 잘 고치기로 소문나 제주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돈도 많이 벌어서 10명쯤 되는 손주들을 모두 대학까지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내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이유로 방금 출산을 한 엄마를 눈물 훔치게 했고, 본인 자식들 중 가장 어린 우리 아빠에게는 땡전 한 푼 주지 않았다. 나도 내 동생도 똑같은 할아버지 손주인데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했다. 엄마는 이에 매우 격분했지만 할아버지보다 빨리 떠나 더 흥분할 만한 뒷일은 보지 못했다.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의원에 갔다. 나도 남들처럼 한약 같은 거 한 번 지어먹어보겠다고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한의원에 계신 선생님은 나를 오래 보지 않고도 내 관상만으로 나에 대해 줄줄 읊었다. 순간 한의원이라는 곳이 신기한 곳이구나 생각했다. 병원에 왔는데 점쟁이를 보러 온 것 같달까.
나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 주는데 호오, 과연 그렇구나 느끼는 가운데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은
“당신은 미국 사람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군요.”였다.
왜 좋았냐면, 내가 정말 미국 사람 안 같은 아빠에게서 자랐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는 전통과 유교사상을 목숨보다 소중히 지키고 따지는 옛날 사람이기에 늘 숨이 막혔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걸 따지나 혀를 찰 일이 있으면 그게 바로 우리 아빠다. 그래서 나는 내 새끼 낳으면 정말 아메리카 식으로 키워야지 했었다. 나는 니 엄마가 아니라 그냥 친구라 생각하라고. 너의 의견은 그대로 너무 소중하다고.
한의원을 나와 조금 걷다 보니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우리 할아버지도 오는 환자들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당신은 고개를 살짝 들고 이야기하는군. 리더십이 강한 스타일이야. 그런 당신에게는 포도와 블루베리가 아주 좋아.”
너무나 과학적이고 시스템화 되어가는 이 세상에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환자를 판단할 수 있는 우월해 보이는 존재. 할아버지도 그랬던 걸까.
한의원의 가장 안쪽에 숨겨진 방 안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다 낡아빠진 사서삼경을 읽고 있던 할아버지의 흰 수염이 생각난다. 할아버지를 만나면 아빠는 그 앞에서 납죽 절을 했고 나랑 성일이를 시켜 할아버지 볼에 뽀뽀를 하고 오라 시켰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좋아하셨지만 어린 나는 할아버지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커서는 할아버지는 왜 아들만 좋아하는 건지 미움의 응어리가 마음에 들어앉았다. 엄마에게 들은 건 죄다 나쁜 것. 딸이어서 이름도 안 지어 주더라 그런 것들.
그런데 또 그게 생각나는 거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내가 아들인 줄 알고 할아버지가 온갖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으라고 갖다 주었다고. ‘아들인 줄 알고’만 빠지면 더없이 좋겠지만.
오늘 나를 본 한의사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본인이 엄청 건강한 거 알고 있지요?”
네, 제가 뱃속에서부터 남다른 관리를 받아서요.
역시 한의사는 한의사를 알아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