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구멍가게만 찾아다니며 가게 그림을 그렸던 이미경 작가의 책을 보며 떠올렸던 것은, 스물아홉 살 울산 간절곶에서 들렀던 구멍가게다.
2011년 6월 초 장마가 시작되기 전, 나는 배낭 하나 들고 이 주간 울진 포항 울산 부산 통영 거제 여수 목포 군산을 찍고 돌아오겠다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그 날은 밖에서 잔 지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해는 저물어 가고, 간절곶 근처에서 하루를 묶어야 하는데 수많은 민박 간판이 보였지만 문을 열지 않은 곳이 허다했다. 그나마 열린 곳도 하루 잘 수 있냐 물으면 여자 혼자는 잘 방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자 혼자서는 잘 방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여자가 문젠지, 혼자인 게 문젠지, 그러니까 뭐가 문제지.
잠 잘 곳을 구하지 못하자 나는 급격히 불안해졌고, 그러다 제일 먼저 보인 펜션 간판을 내건 건물로 재빨리 걸어 들어갔다.
방은 있는데 여기 혼자 자기 넓을 거예요. 6명도 들어가는 데라. 그리고 15만 원입니다.
주인은 내가 그냥 돌아갈 것이라 단정하는 듯 말했는데, 나는 그 방을 달라 했다. 주인이 놀랐던 것 같기도 하고. 찜질방은 만 원 이하 민박은 삼 만원 그랬었다. 전날 내게 문자를 보낸 아빠는 전국 여행하는데 돈은 있는 거냐며 돈 좀 부쳐 줄까 했었다. 나는 받는 걸 잘 못하는 딸이라...... 그러니까 왜.
뜻밖에 과도한 지출을 한터라 늦은 저녁은 간단하게 컵라면이나 먹자 하고 슈퍼를 찾아 나섰다. 눈 씻고 찾아봐도 번듯한 슈퍼는 보이지 않았고 펜션에서 나와 바로 왼쪽 귀퉁이에 붙어있는 작은 구멍가게만이 내 끼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곳 같았다.
여긴 주로 사람들이 낚시하러 오나 보네.
낚시용품이라 크게 써 붙여진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 전혀 예상 못했다는 듯한 표정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설마 내가 오늘의 첫 손님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제품마다 고이 내려앉은 희뿌연 먼지를 바라보다 그냥 나갈까 몇 번을 고민했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내게 머물러 있어 어쩔 수 없이 새우탕 컵라면 1개와 봉지 과자 하나를 집어 계산대에 올렸다.
삼천 원.
할아버지는 무뚝뚝한 편인지 딱 한 마디밖에 안 했지만, 검정 비닐 한 장을 뜯어 엄지와 검지로 비벼서 펼치고 그 안에 나의 라면과 과자를 매우 소중히 넣어주셨다.
검은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펜션에 돌아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컵라면 비닐에 앉은 먼지를 휴지로 쓰윽 닦아냈다. 비닐을 뜯으려는 찰나 눈에 들어온 건 선명하게 찍힌 유통기한이었다. 유통기한은 지난달까지였다. 건대에서 열심히 술 퍼마시고 다니던 지난 5월. 서글픔이 갈비뼈 안쪽에 매달렸다.
아...... 한 달 지난 거 먹는다고 안 죽겠지?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먹을 일은 또 아니잖아. 두 생각이 싸웠다.
한 번도 찾아본 적 없는 봉지 과자의 유통기한이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과자는 아직 괜찮았다.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새우탕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 넓고 외로운 펜션에서 과자는 먹고 새우탕은 못 먹고 잤는데 이른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에서 처음 듣는 우렁찬 새들의 합창을 들었다. 보상받는 기분.
그러니까 그게 슬프고 처량했던 기억인 줄 알았는데, 좋은 기억이었나 보다. 사람이 오지 않는 가게에서 언젠가 올 단 한 사람을 위해 자리를 지키는 할아버지. 전면에 전시된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낚싯대와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조금은 오래된 물건들.
다른 사람이 그린 구멍가게 사진을 보며 내가 떠올린 유일한 곳이 간절곶의 구멍가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