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나는 가요톱10을 지인짜 좋아했다.
서태지와 아이들도 R.ef도 모두 가요톱10에서 보았고, 가요톱10이 하는 날에는 시작 두 시간 전부터 가슴이 두근댔다.
누가 1위를 하는지 어느 가수의 순위가 지난주랑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보다 중요한 건 세상에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나는 TV 보고 싶지 밥 먹기 싫은데 자꾸 엄마는 그 시간에 밥상을 차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밥 먹을 시간에 밥 먹은 건데, 수요일엔 저녁을 안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와 두 살 터울인 이종사촌, 외삼촌의 딸인 정연 언니도 가요톱10을 나만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말하는 (나와 다르게) 외숙모를 맨날 도와주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는 천사 정연 언니는 별로 안 좋았지만, 가요톱10을 보며 같이 흥분해 주는 정연 언니는 꽤 마음에 드는 파트너였다.
“언니, 언니, 김건모 김건모 나왔어.”
숨 넘어 가게 옆에 있는 언니를 불렀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데.
언니가 같이 좋아해 주니까 나는 수요일에 외숙모 집에 가는 걸 좋아했다. 그럼 외숙모는 또 엄청나게 큰 밥상을 가져온다. 아 거슬려 진짜.
정연 언니가 중학생이 됐다며 엄마가 고급진 책가방을 선물했던 봄, 오랜만에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 기가 막히게 또 그날은 수요일이라 언니랑 가요톱10 볼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흘렀다.
외숙모가 부엌에서 밥상 차리는 소리에 신경을 쓰며, 브라운관에 가요톱10 오프닝 화면이 떠오르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언니이이이, 시작해애! 얼른 와. 엄청나게 멋있는 거 같은 신인이 나와아.”
아무리 불러도 자기 방에 들어간 언니가 나오질 않았다. 애가 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언니 뭐해, 왜 안 나와?”
언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내쪽을 바라보더니 눈을 깔고 말했다.
“야, 난 이제 너랑 같이 그런 거 볼 급이 아니야. 애들이나 보는 거지.......”
“......”
나라를 잃은 것처럼 마음이 무너졌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배신감이 배안에서 출렁거렸다.
그때부터 나는 정연 언니를 (마음속으로) 멀리했다. 친하게 지내지 않으리라. 절대로. 정연 언니는 그냥 엄마가 끊임없이 나와 비교하는 보기 싫은 외숙모의 딸이 되었다.
언니는 내게 라면 끓이는 법도 알려주고, 설거지 깨끗이 하는 법, 남의 집에 갈 때는 방울토마토 같은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들고 가야 한다는 것 등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나는 가요톱10을 무시했던 중학생 언니가 용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