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말풍선

기억 속 어딘가로 숨은 '아빠'를 불러 본다

by 나무늘보

‘아빠’를 쓰기로 마음을 먹고, 기억의 낡은 서랍 속을 뒤적거렸다. 이제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먼지가 자욱이 쌓여 있었다. 먼지를 툭툭 털어내자 지난 순간들이 하나둘 서서히 드러났다. 종이 왕관 쓰고 신나서 촛불 끄던 유치원 생일잔치,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이 연사!”를 힘차게 외치던 웅변 대회장, 젤리 하나 까서 건네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 예쁘게 차려입고 온 가족이 다 함께 노래 부르던 교회당, 할머니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멀뚱히 당신의 영정사진만 쳐다보던 아홉 살, 배 타고 떠난 일본 가족여행에서 온종일 국토 대장정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해 여름, 가족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터벅터벅 훈련소로 들어가던 가을 하늘까지. 아렴풋하던 장면 속에 아빠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으나 이내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기억속에 꽁꽁 숨은 아빠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아빠'를 쓰기 위해서 숨어버린 '아빠'를 찾아야 했다. 어릴 적 아빠는 회사 일로 늘 바빴고, 가족들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기억 속 아빠는 창밖 저 너머에 존재했고, 때론 낯선 사람이곤 했다. 지난 시절의 장면 중 어디로 숨어들었나 이곳저곳 살피고, 그렇게 찾아낸 아빠 위에 붙은 빈 말풍선을 채우는 게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태어난 해의 아빠는 고작 30대 후반의 청년이었고, 지금의 나와 한 두살밖에 차이 안 나는 또래였다. '아빠'를 쓰기 위해 내 맘대로 아빠의 말풍선을 떠올리면서 그동안 말없는 아빠의 마음이 무엇일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아빠'의 말풍선을 채우기로 마음먹고, 기억 속 어딘가로 숨은 '아빠'를 불러 본다. 갓 태어난 아들을 받아 든 아빠의 심정과, 두발로 걷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아빠의 감탄사와, '아빠'라는 단어를 두 귀로 들었던 첫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는 아빠의 기분을, 가족들 데리고 떠난 일본에서 이 길 저 길 찾아 진땀 뺐을 아빠의 압박감을, 훈련소로 들어가는 아들의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빠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렇게 미지의 '아빠'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다. 대답 없는 아빠에게 말을 걸고, 굳건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하얀 도화지 같은 당신 얼굴에 무엇이든 그려보기로.



대답 없는 아빠에게 말을 걸고,
단단히 닫힌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하얀 도화지 같은 당신의 얼굴 위에
무엇이든 그려보기로.



<말 없는 아빠와 생각 많은 아들>, 프롤로그


글 / 나무늘보
그림 / 조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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