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맘모스빵

로보트도, 문구세트도 아닌 맘모스빵이라니

by 나무늘보

때는 1998년.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중학생이 되면, 이제는 더 이상 어린이일 수 없다는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어린이로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될지도 모른다고. 아직 한 해가 더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일지 모르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커졌기 때문일까. 크리스마스 전날 밤부터 열두 살 소년은 혼자만의 기대에 잔뜩 부풀었다. 풍선처럼 부푼 마음은 허공을 둥둥 떠다니더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설레는 밤이 꿈처럼 지나갔다. 메리 크리스마스의 아침이 밝았다. 자동 반사적으로 머리맡을 손으로 한 번 쓸어보니 크고 두툼한 촉감이 손으로 전해졌다.


맘모스빵이었다. 왠지 모를 서러움에 북받치더니, 이내 이불속으로 들어가 펑펑 울고 말았다. 내용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포장지는 현재의 상황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 모습에 더 울컥했는지 끅끅 소릴 내었고 베갯잇은 금세 축축해지고 말았다. 울고 또 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늘은 수천 년 전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었고, 교회 가는 날이었다. 두 시간 뒤면 교회에 있어야 했다. 허나 내 머릿속은 여전히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실망감만 가득했다. 교회에서 저마다 받은 선물들을 가지고 자랑할 친구들이 떠올랐다.


맘모스빵을 선물로 받은 어린이는 나밖에 없을 거라고. 그 생각이 서러운 마음을 더욱 키웠다. 애초에 기대가 너무 컸던 내 잘못이라고.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초등학교 5학년도 사실, 어린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열두 살 어린이는 그렇게 염세적 생각의 실타래를 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게 끝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로보트도, 문구세트도 아닌 맘모스빵이라니. 일말의 희망인 양 포장지 꼭지를 손으로 꼭 쥐고, 무작정 엄마를 찾았다. 엄마에게 이게 선물의 전부인지 물었고, 어떤 변명 없이 그저 미안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모든 걸 잃은 듯 절망한 울보에게 세상은 더없이 슬픈 곳이었다. 눈물샘은 또다시 잘도 터졌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투명 포장지를 묶은 금색 끈을 풀었다. 커다란 맘모스빵을 꺼내어 한 조각을 부욱 뜯어내어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눈물과 콧물이 스며든 그 빵은 조금 짜고 달았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이었다.


마음이 잔뜩 가라앉은 내 방에 엄마가 들어왔다. 다시금 내 등을 토닥이는 엄마는 훌쩍이는 나를 달래려 애썼다. 밤늦게 선물을 사려고 집 주변을 돌아다녔고, 때마침 문 연 곳이 빵집뿐이었다고. 물론 당시 산타의 정체는 이미 일찌감치 알았던 터였다. 그러나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한 어린이로서 그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린이로 보냈던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당시 그 기억이 내게 꽤나 강렬하게 남았는지, 이듬해 어느 백일장 대회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쓴 적도 있었다. 그 이야기가 무척이나 슬펐던지 결국 내 글은 뽑히지 않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지난 앨범 들춰보듯 생생했던 그날의 감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는 묻지 못했던,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들이 뒤늦게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은 깊었고, 아파트 앞 상가 건물에는 불 꺼진 가게뿐이었다. 혹시나 문 열린 데가 있을까 싶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을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막둥이 아들의 선물을 챙겨야 했던 당시 아빠의 나이는 쉰 살이었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빵집을 보고 한숨 돌리며 들어간다.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을 빵집에서 아빠는 몇 개 남지 않은 빵을 발견한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제일 크리스마스 선물다운 빵을 고르며 꽤나 고심했을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다음 아빠의 모습도 예상 가능했다. 아들이 깰세라 불 꺼진 방에 아빠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살며시 빵을 올려 둔다. 조용히 방을 나가려다 만 아빠가 잠시 멈추어 선다. 곤히 잠든 내 얼굴을 바라보았을 아빠의 형체가 어렴풋하게 보이는 듯하다. 그 순간에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내게 뭐라고 속삭였을까. 다음 날 아침, 아빠는 실망한 표정을 한 아들을 보았을 텐데.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엄마처럼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까, 아니면 고마워하기는커녕 투덜대는 모습이 괘씸해 보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런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을까. 그때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지금보다 조금은 젊었을 아빠를 그리어 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나도 조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민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무엇을 사주어야 좋아할지 고민하다 보면 이내 막막함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 시절 엄마 아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철없던 열두 살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맘모스빵을 야무지게 뜯어먹으며 밤늦게 고생하신 부모님께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맘모스빵을 들고 거실로 나와서 가족들과 함께 나눠먹을 수 있었을까. 해맑은 미소로 오늘이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라고 자랑하고 있었을까.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위인전에나 나올법한 착한 어린이는 아무래도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랬다면 그날이 조금은 더 행복한 추억으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하루는 누나가 맘모스빵을 사들고 왔다. 웬 맘모스빵이냐는 내 말에, 누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빵이라 했다. 1998년 겨울, 최악의 선물이라 생각했던 그날의 빵.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맘모스빵은 엄마를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이었고, 그 마음을 역시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전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비약이든 오해든 그런 상상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덥힌다. 빵집에 진열된 빵들을 보노라면, 맘모스빵이 제일 먼저 눈에 든다. 맛있게 먹을 엄마 생각이 나서, 깊은 밤 아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던 아빠 생각이 나서, 그렇게 그 빵을 집어 든다.




맛있게 먹을 엄마 생각이 나서,
깊은 밤 아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던 아빠 생각이 나서,
그렇게 그 빵을 집어 든다.




<아빠의 말풍선>, 세 번째 이야기



글 / 나무늘보
그림 / 조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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