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근하게 취한 아빠의 진심을 상상해보다
아빠가 따라 준 소성주 한 잔을 받아 든다. 코 밑까지 들어 올린 잔 속에 콩국 같기도 하고 막걸리 같기도 한 멀건 국물이 출렁댄다. 이십 대가 꺾이기 전까지 술 한 잔을 입에 대지 않던 나였다. 언젠가부터 술을 받아들였지만, 익숙지 않은 맛과 느낌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시큼시큼한 막걸리는 더더욱 아니올시다였다. 그래도 이제는 아빠가 주는 술 한 잔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두 눈 딱 감고 몇 모금을 홀짝댔다. 그 순간, 올라오는 토사물 향내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 놓인 내 잔에는 허여멀건 국물 같은 술이 그대로였다. 아빠의 잔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초록색 병도 한결 가벼워 보였다. 못내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 토사물 향내를 참아낼 만큼 내 비위가 좋지는 않다고 속으로 자위했다. 계산대로 향한 아빠는 말없이 카드를 내밀었고, 나는 신발장에서 아빠와 내 신발을 꺼내놓았다. 나는 신발장 옆 쪽마루에 걸터앉아 뒤축이 구겨진 신발에 내 발을 욱여넣다가 무심코 아빠를 쳐다보았다. 무심한 듯한 아빠의 얼굴은 그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밥 먹는 내내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은 이따금씩 빈 잔에 소성주를 가득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혹시 내 잔을 흘끔 보았으려나. 정말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는 당신이 따라 준, 그대로 남긴 술에 대해 지금까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해한다는 듯 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니면 못내 서운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동안 그런 생각조차 한 적 없는 철없는 아들일 뿐이었다. 단지 아빠의 잔을 받았다는 것 자체를 큰 위안으로 삼았다. 도무지 표정으로는 알 수 없는 아빠는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언젠가 독서모임에서 <16인의 반란자들(사비 아옌 저, 스테이지팩토리)>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과 인터뷰한 글들을 모아 엮었다. 작가 '오에 겐자부로'편을 읽다가 겐자부로와 아빠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그 편의 말미에는 바깥에서의 인터뷰가 끝나고 서로 헤어지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때 겐자부로는 인터뷰어에게 나직하게 말한다. "딱 한잔 만" 하자고. 수줍게 전하는 마음, 천진한 얼굴, 가늘게 떨렸을 목소리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어지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빠의 표정 뒤에 담긴 속내도 그와 같았을까.
겐자부로는 예전에 자주 찾던 술집의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 앉는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그의 몸은 금세 달아오른다. 그제야 소탈한 웃음을 내보이며 자신의 빈틈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인다. 한껏 취기가 오른 그는 대뜸 지난 10년간 이용하지 않았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겠다고 선언하듯 말한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일기를 쓰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백과 함께, 오늘의 시간을 일기장에 남기겠다는 다짐까지 한다. 심지어 만난 지 얼마 안 된 인터뷰어들에게 그들의 언어(스페인어)로 "잘 가요 친구들(Adiós amigos)!"이라는 작별인사도 서슴지 않으면서. 겐자부로의 자리에 슬며시 아빠를 옮겨 놓고, 얼근하게 취한 아빠의 진심을 상상해본다.
한 번은 거나하게 취한 아빠를 데리러 역까지 마중 나간 적이 있다. 십수 년 전 당시 까까머리 학생이었던 나는 아빠를 부축하는 일 정도는 혼자도 거뜬했을 테다. 그런데 아빠를 데리러 가기 위해 엄마와 누나들까지 동원된 걸 보면, 당시 아빠의 상태가 어땠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지하철 매표소에서 만난 아빠는 직장동료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아빠는 우릴 보자마자 그 어느 때보다 반갑게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때의 환한 미소와 장난스러운 말투가 아스라이 떠오른다. 보통 때의 아빠라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다가도 이유 모를 슬픔이 내 마음을 파고들곤 했다.
비틀거리는 아빠의 양 옆에 누나와 내가 단단히 붙어 섰다. 이인삼각 하듯 나란히 그리고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빠가 때때로 비틀댔을 퇴근길, 또 이른 아침마다 버텨냈을 출근길이었다. 역전에서 집까지 도보로 15분 정도 걸린다. 출퇴근할 때마다 걷고 또 걸었던 그 길 위에서 아빠는 말했다. 이 길을 항상 걸어서 다닌다고, 버스나 택시를 타는 건 돈이 아깝다고, 그러다 갑자기 당신 스스로 외롭다고도 했다. 주변에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다며, 분명 다음 날에는 기억도 못할 말일 거라 생각하며 흘려들었다. 그 말들이 마음으로 흘러들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또렷해진다. 평소의 아빠라면 도무지 할 수 없던 말들, 앞으로도 쉽게 듣지 못할 말들이었다.
집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술기운에 들뜬 아빠는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행선지는 집에서 노래방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지쳐버린 누나와 내가 노래방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껏 들뜬 아빠는 어느새 노래방 기계 앞으로 달려갔고, 거침없이 번호를 눌렀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라면서 고른 곡이 <칠갑산>이었다. 아빠의 열창은 흥에 겨운 몸짓으로 이어졌다. 누나들은 노래방 책을 뒤적거렸고, 나는 박자를 탄답시고 탬버린을 잘도 흔들어댔다. 2절이 시작되자 아빠는 엄마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노래 부르는 엄마 옆에서 아빠의 흥은 멈출 줄 몰랐다. 아마도 앞으로 또 없을 우리 가족사의 진풍경일 것이 분명했다.
서비스 시간을 한 두 번 더 받고 나서야 그만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날의 아빠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 행복감이, 잔뜩 달아오른 취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늘 혼자였던 아빠의 길을 함께 걷던 감흥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유난히 맑고도 청량했던 밤공기 때문이었는지, 그때 그곳에서 비틀대며 걷던 아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이지만, 여전히 그때 그 광경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딱 한 잔만" 하자던 겐자부로처럼 아빠의 마음도 그러했을까. 십수 년 전에 미처 못다 한 취중 고백이, 아빠에게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걸까. 딱 한 잔이면 되었을지 모를 그 소성주 한 잔이 못내 아쉬워진다. 문득 얼근하게 취한 아빠의 진심이 그리워진다.
문득 얼근하게 취한 아빠의 진심이 그리워진다.
<아빠의 말풍선>, 네 번째 이야기
글 / 나무늘보
그림 / 조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