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따라 준 소성주 한 잔을 다시 받아 들었다. 끝내 비우지 못했던 한 잔의 술을 다시 마주했다. 오늘만큼은 받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빠는 말없이 아들의 빈 잔을 채웠다. 이따금씩 아빠의 시선은 아들의 잔을 향했다. 아들은 여러 차례 잔을 들었다 놨다 했다. 코끝에 진동했던, 흡사 토사물 향내 같던 그 냄새는 여전히 불편했다. 결국 숨 참고 남은 술을 쭉 들이켰다. 톡 쏘는 사이다 맛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허나 익숙지 않은 맛이라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국물 한 숟갈에 깍두기 한 점을 입 속에 밀어 넣고 어그적 어그적 씹어 넘겼다.
이제 곧 아빠의 생일이었다. 그 날 엄마는 이미 약속이 있었고, 아빠는 혼자 집에 있어야 했다.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겠다 싶었다. 아들은 휴가를 내고 대뜸 아빠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장소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평 두물머리.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금 당황한 아빠는 흔쾌히 좋다고 말했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런지 이해는 갔다. 운전대를 잡은 지 일 년 밖에 되지않은 아들이 못 미더웠을까. 아니면 아들과 단둘이 하루 온종일을 보내야 하는 것이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그중후자의 공산이 더 클 것이라 생각한 건 아들의 직감이다. 걱정한대로 오늘 하루 내내 어색한 공기가 따라다닐지 모른다. 그러나 여행 가기로 결정한 이상, 오늘만큼은 아빠도 아들도 어색함을 피할 수 없는 그런 날이었다.
아빠와 아들이 차 안에 나란히 앉았다. 아들은 운전대를 잡고, 아빠는 인간 내비게이션을 자처했다. 여행 시작부터 불편한 마음이 한가득 차올랐다. 아빠는 갈림길에 들어설 때마다 내비게이션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이 길로 가는 게 더 빠르다면서. 가뜩이나 운전이 미숙한 아들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들은 결국 아빠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몇 마디 내뱉고 말았다. 몇 분 빨리 가느니 그냥 편하게 내비게이션을 따라가겠다고. 아빠는 못 들은 척 답이 없었다. 아들도 아무 말 없이 운전대만 부여잡았다. 역시나 걱정했던 어색한 공기만이 차 안에 가득했다.
평일이라 한적한 양평 세미원에는 난데없이 부는 바람이 매서웠다. 햇살 드는 따뜻한 날인데도 세찬 바람에 제대로 걷기조차 어려웠다. 두물머리로 건너가 볼까 한참을 걸었으나 공사로 인해 다리는 막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리 정해 둔 식당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지난해 문 닫은 사실을 안 것은 이미 그곳에 도착한 후였다. 밥 먹으러 어딜 가야 하나. 차를 한 곳에 잠시 세우고, 아무 생각 없이 고갤 들어 정면을 보았다. 후순위로 정했던 식당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조금 비싸 우선순위에 밀린 한식당이었다. 가격표를 본 아빠는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에 멈칫한다. 아들이 내는 거니 맛있게 드시라 했지만, 아빠의 표정은 식사 내내 불편해 보였다. 애써 이 말 저 말 건네보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괜히 왔나 싶은 생각이 들자 나도 불편해졌다.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한동안 유리창 너머의 빗소리를 배경 삼아 조용히 밥만 먹었다. 소나기일까 싶었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쉽게 멈출 비가 아닌 것 같았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식당 밖으로 나왔다. 다시 운전대를 잡은 아들은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점심 먹기 전부터 아빠는 용문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빠는 그곳에 있다는 천년 넘은 은행나무가 보고 싶다면서. 그 절은 왠지 산속 깊은 곳에 있을 것 같았다. 비 오는 지금, 미끄러운 빗길을 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는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빠와 아들의 마음은 서로 자기 쪽으로 영차영차 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종내 줄다리기를 포기한 아들은 결국 내비게이션에 “용문사”를 찍고 있었다.
그새 비가 그쳤다. 혹시 또 비가 올지 몰라 우산을 하나 챙겼다. 주차장 직원은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용문사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 말에 힘을 얻어 용문사를 향해 걸었다. 한참 걸어 올라 도착한 곳은 용문사가 아닌, 용문사 공원이었다.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니, 용문사도 천년 먹은 은행나무도 여기서 한참을 더가야 볼 수 있었다. 괜스레 주차장 직원이 야속했다. 거동이 편치 않은 아빠에게 용문사까지 가겠는지 물었다. 아빠는 은행나무는 보고 가자 했다. 다행히도 가는 길이 평탄해서아빠가 걸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용문사까지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멀었고 인적은 드물었다. 아빠와 아들은 별다른 말 없이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세월의 무게를 거스르며 우뚝 솟은 은행나무가 보였다. 초봄이라 앙상한 나무는 짙은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아빠는 외롭게 우뚝 솟은 은행나무를 지그시 보았다. 핸드폰을 들고 그저 조용히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아빠는 나무를 보며 어떤 기분이 드는지, 가만히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들은 일일이 묻지 않고, 말없이 나무 앞에 아빠를 세웠다. 아빠는 용문사 은행나무 옆에 나란히 섰고, 당신 앞에 선 아들은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던 그날의 풍경을 마음에 담았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는 금세 굵어졌다. 인적이 드문 용문사 한 바퀴를 천천히 돌고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하나뿐인 우산 아래, 아빠와 아들이 나란히 섰다. 내리막길이라 미끄러울까 싶어 팔짱을 끼고 아빠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아빠와 아들, 둘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제로에 가까운 순간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게 낯설긴 해도, 싫지는 않았다. 아빠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같은 우산 아래서 아빠는 아들에게 이 말 저 말을 걸어왔다. 빗소리에 실려 오가는 말들이 나쁘지 않았다.
문득 아빠가 궁금해졌다. 아빠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무슨 일을 했는지.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는지. 아빠는 언제부터 독립해서 살게 되었는지. 서울은 언제 올라왔는지. 엄마는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들은 인터뷰어처럼 별의별 질문들을 쏟아냈다.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당신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풀어냈다. 처음 듣는 아빠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아빠에 대한 기억이 한층 선명해졌다. 한편 내 기억과 전혀 달라 놀라웠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아빠라는 존재가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아빠의 얼굴은 취기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설렁탕 두 그릇, 소성주 한 병뿐인 단출한 저녁이었다. 아빠가 기분 좋게 저녁 값을 계산했다. 점심 먹는 내내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던 아빠의 표정이 이제야 한결 밝아 보였다.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켠 소성주가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며 요동쳤다. 신나게 춤추는 배를 부여잡는다. 온 힘과 생각이 아래로 집중되고, 곧장 화장실로 달리고픈 생각뿐이었지만. 아빠의 미소가 보이고 비 개인 하늘은 맑디 맑았다. 같은 하늘 아래서 아빠와 나란히 맞춰 걷는 아들의 발걸음이 가벼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