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빈손

문 열고 들어오는 아빠의 양손이 무겁다

by 나무늘보

문 열고 들어오는 아빠의 양손이 무겁다. 엄마가 받아 든 검은 봉지에 누나와 나의 시선이 쏠린다. 그새를 못 참은 고소한 냄새는 좁은 틈을 비집고 나오더니 마루까지 달려 나간다. 우리의 콧구멍으로 직행한 냄새는 꽤나 강렬했고, 코끝에 아렴풋하게 남아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누나와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봉지가 전하는 온기를 가만히 느껴본다. 우리는 서로 조용히 미소를 주고받는다. 그것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기통닭인 것을 알아채고는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켜본다.


긴 하루의 끝에서 아빠를 비추는 가로등 아래의 풍경을 그려본다. 가로등에 살짝 기대어 서서 크게 내쉬는 하얀 입김에는 술 냄새가 진동한다. 술 한 잔에 하루의 긴장이 녹아내리니 발걸음이 유난히도 가볍다. 늘 걷던 퇴근길에 번쩍이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전기구이 통닭'이라 쓰인 간판 앞에 멈추더니 당신의 지갑이 순순히 열린다. 평소 차비가 아까워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닌다는 아빠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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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겋게 타오르는 화로 속에서 통닭은 쉼 없이 돌고 돈다. 통닭 두 마리가 아빠의 손을 한쪽씩 맞잡고 퇴근한다. 묵직한 그것들은 제 무게로 비틀대는 아빠의 걸음에 균형을 맞춘다. 캄캄한 밤하늘 아래 익숙한 길 위를 걷던 아빠는 당신을 반겨줄 누군가를 떠올리다가 이내 콧노래를 불러본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즈음에야 집 문 앞에 선다. 여느 날과 달리 설레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누른다.


술 냄새는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는 고소한 냄새를 품은 검은 봉지만 색했다. 주목받지 못한 아빠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흐릿하다.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을 아빠의 얼굴은 아마도 당신의 딸과 아들의 이름을 크게 불렀을까. 오늘따라 유별난 아빠의 기분이 어떤지, 치이고 치였을 그날의 하루는 어땠는지 혼잣말하듯 쏟아냈을까. 그저 노릇하게 구워진 닭껍질과 부드럽게 찢기는 통닭의 살코기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거실에 둘러앉아 온통 통닭에만 집중하는 우리에게서 아빠는 저 먼 섬이 되고 말았다.


아빠의 구애는 포기를 몰랐다. 술 한 잔 들어가면 더욱이 그랬다. 어느 날엔가 생선초밥이 아빠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유독 아했던 음식이다. 만화 <미스터 초밥왕>이 그 이유의 팔 할이다. 참 맛있게도 그려낸 초밥도 초밥이거니와, 초밥 한 점을 먹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고 박수를 치며 감탄하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내 최애 음식은 초밥이 되었다. 뭐 먹고 싶냐는 물음에 늘 '초밥' 노랠 부르곤 했는데 그 말을 아빠는 잊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오늘 회식이 있어서 늦을 것 같아." 아빠는 오늘도 늦게 들어간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수화기를 내려놓던 당신은 매번 늦게 집에 들어가는 게 못내 미안해진다. 애들 얼굴 본 지도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가만있어 보자, 우리 애들이 무엇을 좋아했더라. 맛이 깔끔하고 좋아 자주 가던 일식집이 오늘의 회식 장소였다. 아들 녀석이 맛있게 먹을 모습이 떠오르고, 아빠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다. 오늘만큼은 아들 생각에 술을 조금만 마시고,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다. 혹시나 까먹을까 싶어 미리 주문해 둔 초밥세트를 챙기고, 식당 문을 나선다. 행여 초밥의 모양이 흐트러질까 싶어 초밥세트가 담긴 종이가방을 정성스레 안고 걷기 시작한다. 어둑어둑해진 밤 길 위에서 집으로 향하는 아빠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무심한 듯 건넨 생선초밥 도시락을 떠올려 본다. 여기 초밥이 그렇게 맛있다고, 당신이 퇴근 후에 자주 가는 곳이라고, 오늘따라 초밥을 좋아하던 네가 생각이 났다고,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던 아빠의 고백을 더듬더듬 기억해본다. 그 후로도 종종 아빠의 손에는 초밥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저녁을 배불리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언제나 도시락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것이 아빠의 보람이 되었을까. 어제는 초밥, 오늘은 만두가 아빠의 손을 맞잡고 퇴근하곤 했다.


이제는 출퇴근의 쳇바퀴에서 내려온 지 한참이 된 아빠의 머리칼이 하얗게 세었다. 더 이상 회사가 아닌, 공원으로 향하는 것이 아빠의 출근길로 변한 지 오래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은 아빠의 퇴근길이 된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희뿌연 연기가 올라오는 만두집이 보이고, 기름 튀는 소리가 요란한 치킨집도 보이고,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족발집도 보인다. 북적대는 시장을 지나고 나면, 오늘도 아빠의 양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다. 여전한 그 시절 그 마음도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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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이 지나, 아들은 아빠가 내린 출퇴근의 쳇바퀴에 오르게 되었다.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된 아들은 주말에만 집에 들른다. 늦은 밤 집에 들어오면 식탁 위로 시선을 두었다가 자연스레 냉장고를 열어 본다. 기대에 어긋남 없이 식탁 위, 냉장고 안에서 무언가를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각종 아이스크림이기도 하고, 고기반 김치반 왕만두이기도 하고, 새로 나온 햄버거이기도 하고, 기름이 눅진하게 밴 시장 통닭이기도 하다. 모두가 곤히 잠든 시간, 퇴근한 아들은 행여 아빠가 깰까 조심스럽게 당신의 양손에 들렸을 무언가를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피아노 영재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일하는 아빠를 한국에 두고 엄마와 함께 이탈리아 유학을 떠난 소년의 당시 나이는 열 살. 하루는 젤라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소년은 엄마에게 말했다. 현금인출기 화면에 엄마의 통장 잔고가 '0'인 것을 보고 만 소년은 다시 엄마에게 말했다. "젤라또 안 괜찮아요. 그 돈은 한국에서 혼자 외롭게 벌어준 아빠의 외로움 값이니까요." '외로움 값'과 '아빠의 빈손'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열 살의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아빠가 치렀을 값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그 사이 "땡"하는 소리가 전자레인지에서 울렸다. 전자레인지 문을 열고, 그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당신의 빈손을 꺼내어 본다.


빈손으로 터덜터덜 길을 걷는 아빠가 보인다. 하루가 쏜살같이 도망가고 남은 어스름한 저녁 하늘에는 달만이 덩그러니 떠 있다. 공연히 차오르는 헛헛한 마음을 한숨처럼 푹푹 내쉬는 아빠의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린다. 안개에 가리운 길 위에서 당신은 걷고 또 걷는다. 눈에 띄는 가게에 들러 빈 손에 무언가를 쥐고 나서야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가 보인다. 양손 가득 쥔 무언가는 언제나 당신 것인 적이 없었다. 양손에 실린 무게는 아빠에게 위로 또는 자존심, 때론 책임감이었을까. 그저 막연히 상상해보는 아빠의 빈손은 사실, 여전히 내게 낯설다.



양손 가득 쥔 무언가는 언제나 당신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양손에 실린 무게는 아빠에게 위로 또는 자존심, 때론 책임감이었을까.
그저 막연히 상상해보는 아빠의 빈손은 사실,
여전히 내게 낯설다.




<아빠의 말풍선>, 여섯 번째 이야기



글 / 나무늘보
그림/ 조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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