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을 알게 된 뒤 겪은 감정의 변화 2편
지난 포스팅에 이어 커블러 로스의 변화 곡선에 따라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을 알게 된 뒤 제가 겪은 감정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 이어가 볼게요.
5단계, 실험 - 새로운 현실에 대한 최초의 연결
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조금 상태가 호전된 것도 있었지만, 판데믹 상황도 조금씩 나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심해진 우울증으로 직장에는 휴직계를 낸 상태라 시간적인 여유도 더 있었습니다. 당시 제게 이 시간적인 여유는 거의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업무로 바쁘면 제 시간만 바빠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몸살을 앓는 상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을 부담스럽다 못해 두려워 했고 아이는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더욱 심하게 보챘습니다. 제가 일을 잠시 내려 두고 오롯이 엄마 역할에만 집중하니 이러한 혼돈이 조금 잦아들었고 저도 비로소 한 숨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때 서서히 남편에게 공식 진단을 권유했습니다. 그 때까지 공식 진단 없이 감정적으로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던 것은 사실 관계 개선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 뒤에 드디어 남편에게 차분히 진단을 권유하고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을 알게되고 난 최초 시점부터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네요. 진단도 쉽지는 않았지만 사실 진단이 새로운 해결책을 바로 가져다 주지는 않았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할 수 있는 전문가도 많지 않았지만, 그에 근거해서 관계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에 대한 코칭을 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22년 7월인 현재에는 미국 AANE라는 기관에서 진행하는 뉴로다이버스 커플을 위한 강의와 코칭 프로그램이 생겨 저희 부부도 이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강의나 코칭이 전무했습니다. 그나마 자폐스펙트럼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은 호주에서 이런 상황이니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더 어려운 상황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진단 후 바로 어떤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남편의 진단으로 저희는 관계를 새로 바라보고 저도 새롭게 현실을 받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받아 들였다는 점이 제게는 새롭게 현실을 받아 들이기 시작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편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한다면 관계 개선의 가능성은 매우 적으니까요.
6단계, 결정 - 새로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받아들이고 더 긍정적으로 느낌
남편의 진단 이후 조금씩 남편의 아스퍼거적인 성향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따로 한 번 다루고 싶은 주제이긴 한데 남편도 본인의 아스퍼거 증후군을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에게도 이런 과정을 소화하고 내면의 갈등을 극복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서로 뉴로 다이버시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다름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인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해 읽었던 자료들에서 아스피들의 장점에 대한 논의들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달리 긍정적인 시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남편에 대한 원망, 미움, 분노, 내 삶에 대한 절망, 좌절 등의 많은 감정들 때문에 아무리 아스피들만의 장점이 있다고 한들, 나와의 관계에서는 결국은 나를 힘들게 하는 나와는 다른 뇌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 때가 있었거든요.
사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딸아이 때문이었는데, 아이를 생각한다면 남편의 다름을 이해하고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 보고 싶었고, 남편도 이에 동참해 주기를 간절히 바랬었습니다. 결국 남편은 사랑하는 딸아이의 아빠이고, 이 두 사람들은 제 소중한 가족들이니까요. 소중하게 이룬 제 가족이 제대로 된 노력도 하지 않고 깨어진다면 더 큰 후회와 아픔이 남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이런 마음의 결정을 하고 조금씩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꿔 가자 남편도 점차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제가 원하는 만큼 까지는 아니지만 제 말을 귀 기울여 들으려 노력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저도 비현실적인 기대치는 내려 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형인인 저는 감정적 교류와 소통에 대한 아쉬움과 갈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충족되지 않은 마음의 빈자리들은 여전히 시리고 아팠지만 이조차도 서서히 다루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7단계, 통합 - 변화가 통합됨. 새로워진 자아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이 제 결혼 생활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억울해하지 않고 수용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시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사실 극심한 분노와 슬픔을 계속 마음에 담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방어기제가 현실과 타협하고 새로운 현실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지난 글 중 번역문의 설명처럼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정확하게 단계별로 시간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1단계가 지나고 2단계가 오고, 이를 모두 거쳐 7단계에 이르면 이전 단계의 감정들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는 제 경험을 순서에 맞게 서술하기는 했지만, 중간 중간 여러 단계의 마음들이 왔다 갔다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득문득 현재 모든 상황을 수용한 상태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끔 '티키타카' '꽁냥꽁냥'이 어려운 남편과의 관계가 서글프고 아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뉴로다이버스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 못해 지금 당장 이혼을 해야겠다거나, 그로 인해 우울함에 빠져 현재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커블러 로스의 감정 변화 곡선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 가까운 가족구성원의 갑작스러운 장애 진단, 갑작스러운 시한부 질병 진단 선고와 같은 상황에서 이를 받아들이며 보이는 감정 변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이 정도의 시련, 상실감, 충격적인 상황을 겪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우 복합적이고 강력한 감정 상태들을 거치게 되는 과정일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나서 감정적인 괴로움이 누그러지고 다시금 새롭게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해당 사건은 안타까움이나 아쉬움, 그리움 등과 같은 마음들을 남길 것입니다. 제가 제 결혼에 뉴로다이버시티를 받아 들인 것도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남편이 자폐 스펙트럼에 있기 때문에 남편의 뇌구조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저는 정형인이기 때문에 제 뇌구조 역시 바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배우자와의 소통과 친밀함, 감정적 교류에 대한 기준의 남편이 원하는 기준과 영원히 같을 수 없죠. 부부라는 인간 관계는 사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 관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포기하는 것은 제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결혼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그 상실을 애도하고 받아 들여야만 하는 과정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수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소통과 교류의 방식과 정도를 비슷하게 원하는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런 관계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가까운 가족 구성원을 잃고 그 상실이 너무나 슬퍼 힘겨운 애도의 과정을 거친 후 그 사실을 겨우 받아 들였지만, 여전히 그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워 하는 마음과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엄마를 잃은 아이가 애도를 거치고 겨우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면서도 다정한 엄마와 딸의 모습을 보면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처럼요. 남편은 저를 굉장히 사랑하지만 제가 그 관계 속에서 느끼는 애정은 제가 자연스럽게 따뜻하거나 충만하다고 느끼는 것과는 결이 매우 달라서 다정한 부부나 커플들을 보면 그런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누구나 저마다 인생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상실을 결국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처럼 저도 이제 제 결혼생활의 상실을 어느 정도 수용한 상태입니다. 누구든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듯이, 상실이 있는 관계이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제게 놀라운 기쁨을 주기도 하고, 제게 다른 방식으로 애정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부분이 있다고 말이죠.
때로는 이런 감정 변화 곡선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결혼 후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제 스스로의 인간 관계를 다시 바라보면서 또 다른 상실과 애도를 거치는 과정이 겹쳐 일어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아스피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 상당수의 정형인 배우자는 부모님과의 관계나 이전의 가깝고 중요한 인간관계 등에서 받은 영향으로 형성된 자아나 특성이 원인이 되어 아스피 배우자에게 끌린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Anne Macmillan(뉴로다이버시티 가족구성원으로 45년, 뉴로다이버스 커플로 20년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뉴로다이버시티에 관련한 코칭, 상담 등을 하는 전문가.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석사)은 뉴로다이버스커플의 정형인 배우자의 원가정 부모 역시 자폐 스펙트럼에 있었거나 나르시스트적 성향이 있는(정확히 파악하면 다른 면이 있지만 표면적으로 볼 때 자폐스펙트럼과 나르시시즘은 유사점이 많다고 합니다)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 합니다.
제 경우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 보게 되었고, 그 안에서 내면 아이를 마주하며 또 다른 상실과 애도를 동시 다발적으로 겪었던 것 같습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을 치열하게 거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의 말처럼 뉴로다이버스 커플의 많은 정형인 배우자들의 경우 소통과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역기능적인 관계에 익숙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지금 현재의 관계 뿐 아니라, 현재 관계가 끝난다고 해도 향후에 만날 다른 파트너와의 관계를 잘 맺어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구요.
긴 글의 결론은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거나 상황에 있으신 많은 분들에게 끝날 것 같지 않은 터널 속에서 분노와 슬픔, 우울감을 겪고 난 이후에는 결국 어떤 결론에 다다르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살아갈 에너지를 얻게 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결론의 답은 상황에 맞게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내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꼭 저처럼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인데요. 상황에 따라 아스피 배우자가 폭력 성향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있거나 하는 등등 다른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힘든 이유들을 동반하는 경우에는 헤어짐이 결론이 되실 수도 있겠지요. 아스피 배우자 모임에서 만나는 많은 정형인 배우자 분들은 전 남편과 이혼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러한 감정 곡선을 겪으며 서포트 그룹에 오시는 경우도 많고, 그렇게 해서 결국 행복한 삶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으십니다.
어떤 결론에 다다르시든 그리고 본인이 정형인이든 아스피 배우자이시든 현재 겪고 있는 관계는 정확히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 정말 어려운 것이 맞습니다. 그 안에서 겪으시는 많은 어려움과 힘든 감정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 또한 언젠가는 지나가리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