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nto mori
<삶의 끝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라는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죽음에 맞닥뜨려진 사람들이 쓰는 편지나 유서가 등장한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는 언제일까. 80대? 82세로 세상을 떠난 올리버 색스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바로 내가 신경과 의사를 하게 된 계기가 되어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이다.
두렵지 않은 척은 못 하겠어요. 하지만 나는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지금까지 사랑했고 사랑을 받았어요. 지금껏 많은 것을 받았고 또 어떤 것은 나눠줬어요.
-올리버 색스-
나쁜 병에 걸려 일찍 죽는 사람만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백 살이 넘어도 죽음은 싫고 무서울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쓰려고 유서를 200편 정도 찾아 읽었다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얻은 깨달음에 대해 기술한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 등대가 되어 준다. 겸허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 작가는 진부한 말이 진리라며, 겸손한 사람이 감사하고 감사하면 행복하다고 전한다. 항상 죽음을 기억할 것. 오늘이 마지막인 듯 살아갈 것.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우리가 곧 불가피하게 죽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으면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30분 후에 죽는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30분 사이 사소한 일이나 바보 같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 당신은 죽기 전까지 50년이 남았을 수 있다. 그런데 50년과 30분이 뭐가 그렇게 다른가?
-톨스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내가 찾은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나는 그것 덕분에 인생 최대의 선택을 할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의 기대, 모든 자만심, 실패하거나 창피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등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다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마하트마 간디-
책을 읽고 미리 유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딸에게 쓰는 유서, 매년 업데이트될 죽음을 떠올리며 쓰는 이야기. 이런 것들을 쌓아가다 보면 하루하루 정말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우선순위가 확실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금 더 긍정적인 사람들을 곁에 두고, 조금 더 내가 재밌는 일을 하고, 조금 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조금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으니, 차분히 생각을 좀 해보기로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음으로 고른 책이 허지웅의 에세이집, <살고 싶다는 농담>이다. 허지웅 작가는 내게 <마녀사냥>으로 반짝 그린라이트를 울리며 내 마음속에 들어왔던 그때 그 영화평론가가 아닌가. 매끈한 외모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신동엽과 성시경과 함께 신랄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진행을 이어갔을 때, 내겐 이미 그린라이트였다. 초반 방송은 덕분에 열심히 챙겨봤다. 이런저런 이유로 방송도 못 보게 되고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도 점점 멀어지며 서서히 잊혀 가던 중, 책 표지에서 발견한 허지웅. 그 사이 이미 죽음에 한번 가까워진 경험을 했고 전후로 겪은 심경의 변화를 담담히 녹여 이 책을 냈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함께 버티어나가자 라는 말을 좋아한다
삶이란 버티어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심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되기를
오늘도 나는 나와 다투고, 또다시 친구가 되기를 반복한다.
지치는 노릇이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직설적이고, 담담하고, 읽히기 쉽고, 이해하기 편한 문장들이다. 본인이 애정 하는 <스타워즈> 영화를 정리한 에세이가 있는데, 난 그렇게 이해하기 쉽고 재밌게 요약한 글은 본 적이 없었다. 애정을 담아, 긴 시리즈를 보지 않았어도 이해가 쏙쏙 되게 잘 정리했는데 심지어 예리하기까지 하다. 평소에 내가 서평 등을 즐겨 보지 못하는 이유가, 직접 보고 겪지 않은 것은 잘 이해도 안 될뿐더러 무슨 내용인지도 잘 와닿지 않기 때문인데 이상하게 안 본 영화도 이해가 잘 됐다. 심지어 실제로 보고 싶게까지 만드는 능력까지! 그리하여 <스타워즈> <라라 랜드>는 다시 봐야 할 영화 목록에 올랐고, <엘리펀트 맨>,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깊은 밤 갑자기>는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등극하였다.
이 책에서 작가는 최은희의 삶에 대해 두 번 에세이를 썼는데, 나는 이게 왜인지 무척 가슴 뭉클했다. 보통의 삶에 대해 덤덤히 썼을 뿐인데,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매거진 <해바라기 화실>에 나오는 보통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최은희의 삶을 기술한 것이 내겐 유달리 큰 감동으로 와닿았다.
그녀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정치인도 아니고 영웅도 부자도 아니었다. 정파성이 없으면 회색으로 분류되는 지금 시대에 그녀에게는 아무런 색깔이 없었다. 그냥 보통사람이었다. 평생 사사로이 남을 속이지 않고 맡은 일에 성실하며 타인을 배려했던 보통사람이었다.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결코 좌절하는 법 없이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던 보통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식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보통의 어머니였다. 보통사람 말이다. 그런 보통사람 최은희의 삶에 대해 꼭 남기고 싶었다. 이건 중요한 일이다.
언제고 사람은 죽는다. 그게 내일이 될 수도 있고 50년 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최근 재밌게 봤던 드라마 <서른, 아홉>처럼 췌장암 말기를 진단받고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시한부를 살기로 결정할지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사고가 나서 준비 없이 저 세상을 뜰 수도 있는 게 사람 인생이다. 언제나 기억하자.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도 찰나의 행복을 위해 한걸음 내딛는 하루가 되자. 죽음을 앞둔 우리에게 허투루 쓸 시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