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아이들
학습연구년으로 인해 새 학기 준비로 인한 고단함이 잠시 빗겨 나 숨 고르기를 하던 어느 날, 꿈결처럼 20년 전 제자에게서 카톡이 왔다.
선생님, **여고를 졸업한 은실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실는지요? 그동안 자리를 잡지 못해 연락드리지 못했는데 용기 내어 카톡 드려 봅니다.
은실이가 졸업한 **여고는 내 첫 발령지로, 모든 게 처음이라 풋풋함이랄지 어설픔이 장착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열정과 치기 어린 패기를 항시 내뿜던 곳이다. 특히, 2007년에 졸업한 은실이네 학년은 3년 내내 담임으로 따라올라가 정이 안 들 수 없었던 아이들이었고,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누가 몇 학년 때 몇 반이었던 것까지 기억나던 찐득함이 있었다.
은실이는 번호를 안 바꿔서 그런지 카톡에 자동 친구로 등록되어 있었고, 프로필 사진이 바뀔 때마다 잘 살고 있구나, 이제 제법 어른이 되었구나 혼자서만 되뇌던 아련한 제자였다. 그런데 그런 학생이 20여 년 만에 연락이 와서 직접 만나자고 하니-반가우면서도 놀라운 생각에, 혹시 연락의 목적이 종교 전파 혹은 다단계 영입(?)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늘 단정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선생님 말을 습자지같이 흡수하는 순수한 아이였다.
약속을 잡고 동네 커피점에서 만나기로 한 날. 약간의 두근거림을 안고 나갔더니 20여 년 전으로부터 걸어 나온 듯한 하나도 변하지 않은 은실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은실이가 자리 잡고 있던 테이블로 가보니 웬 큰 트렁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건 또 뭐지 의문을 품고 앉으니, 은실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선생님, 이야기하자면 긴데, 제가 이번에 다시 지역 의대에 입학하게 되었어요.
으...응? 편입도 안 하고 1학년으로?
네, 작년에 수능을 보고 운이 좋게도 의대에 붙어서 다니게 되었어요. 수능 준비하면서 선생님 생각도 많이 나고, 또 이 지역으로 오게 되어 연락드리게 되었어요.
축하해. 진짜 대단하다. 근데 그렇게 공부가 좋으냐?ㅋㅋ
사실 은실이는 고3 담임으로 진학지도할 때 서울대 원서를 같이 쓴 유일한 제자였다. 그 겨울 은실이로부터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내 일처럼 기뻐하던 날이 기억난다. 그리고 입학 후, 날고 긴다는 아이들 속에서 자신이 정말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논리적인 말하기'가 그곳에서는 평범한 말하기에 불과하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던 메일도 단편적으로 기억난다. 그래도 늘 열심히 하는 아이였기에 잘 자리 잡고 있겠거니 생각했지, 다시 수능을?
졸업하고 **전자에서 일하다 **자동차로 이직해서 잘 지냈어요. 근데 여자로서 그런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생 뭘 하면 잘 살 수 있다 생각하다가, 의사를 해 보면 어떨까 하고 작년에 준비하고 올해 입학하게 되었어요.
말은 조근조근 하지만, 그 속에 얼마나 치열함과 고통과 아픔이 있었을까? 대단하다는 말 밖에. 그런데 요즘 의료 파업이라는 시대적 흐름으로 기숙사에 풀었던 짐을 싸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