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머즈와 슈퍼맨
숲 속에서 걷는 건 마치 모험 놀이공원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 온갖 야생동물이 갑자기 튀어나와 놀라게 하기도 하고, 숨겨진 비밀의 풍경이 휙 하고 펼쳐지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내 한계를 넘어설 때마다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그 순간들! 평소엔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을 느끼며, 때론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한데 이게 또 사람을 묘하게 중독시키는 매력이 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힘들다고 느끼다가도 정상을 밟는 순간 그 힘듦은 마법처럼 사라지며 자존감이 낮은 자신 스스로도 성취감에 취하여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어쩌면 그래서 힘든 산행을 끊지 못하고 자꾸 가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회에서나 작업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이건 어쩌면 사회적 동물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속을 거닐다 보면 그 복잡하고 힘들었던 일들은 이내 단순하게 느껴지고 한 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게 되는 문장이 있다. 모든 일은 이렇게 차분히 한발 한 발에서 시작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점에 도달해 있다고.
산속에서 백패킹을 10일 이상 하게 되면 나의 신체 감각들이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깨어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평소에도 냄새와 소리에 민감한 편이지만 숲에선 거의 동물적 감각으로 레벨 업하는 것이다. 며칠 씻지도 못하고 야생에 몸이 적응을 하다 보면 인공적인 향에 굉장히 예민해진다. 트레일을 걷다가 바람을 타고 오는, 트레일을 막 시작한 깨끗한 상태의 등산객들의 샴푸, 향수 같은 비누 향에 코가 벌름거린다. 그럼 어김없이 앞에 선두로 선 친구에게 알려준다.
“앞에 사람들이 오고 있어.”
“그걸 어떻게 알아?”
친구가 물어본다.
“넌 저 비누냄새가 안 나? 분명 사람들이야. 등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러고 잠시 뒤, 그 향기의 주인공을 만나면 친구는 말한다.
“넌 어떻게 그걸 맡을 수 있어? 대단해!”
만남 지점에서 우리가 걷는 속도와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들의 속도로 봤을 때, 분명 거리는 100미터 이상이다. 그럴 때마다 난 내 안의 '소머즈(70년대 공상과학 시리즈에 나오는 초인 여성 캐릭터)'가 깨어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물론 소머즈처럼 강철을 구부리는 능력은 없어도 내 몸이 점점 짐승화 되는 걸 느끼면 슈퍼 파워를 얻은 것 같다. 마치 '숲 속의 냄새 탐정'이라도 된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 능력은 슬프게도 2년 전에 걸린 코로나의 후유증으로 이젠 평소의 냄새 70% 정도밖에 맡지 못하게 되었다. 뭔가 슈퍼파워를 잃어버린듯한 우울함이 생겼다.
영화 ‘와일드’를 보면 초반에 리즈 위더스푼이 PCT 사막에서의 첫 날밤, 멀리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 불안해하며 여러 번 손전등을 껐다 켰다 하며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먼발치에서 토끼가 다니는 소리였는데 그 장면을 보고 큰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숲 속에서 자는 첫날밤은 불안해서 두 귀가 쫑긋 한 토끼가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처음 백패킹을 시작할 때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불안해서 잠을 설쳐봤기 때문이다. 굉장히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텐트에 누우면 떡 실신하게 되지만 텐트 주변에서 들리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는 왜 이렇게 가깝게 들리는 것일까. 새벽동안 친구를 깨운 게 여러 번이다. 다행히 대부분이 큰일이 아니었지만 한 번은 커다란 버펄로가 텐트 옆을 걸어 다녀서 깨기도 했었고 이른 아침 텐트 주변으로 ‘타탁’ 거리는 나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 친구를 깨워 나가 보니 커다란 무스 세 마리가 거대한 뿔로 힘 겨루기를 하고 있기도 했다. 캠핑을 다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조용한 텐트 속에서 들리는 발자국의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숲 속에서는 동물적 감각이 필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야 최소한의 자기 방어는 준비할 수 있을 테니.
나의 후각과 청각에 비해 함께 등반을 하는 친구 같은 경우는 동체시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안경을 써도 0.8 이상을 보기 힘든 나로서는 굉장히 부러우면서 의지가 되는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눈이 좋은 사람은 자세히는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잘 발견한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나 눈에 띄지 않게 숲 속에 위장한 동물들을 먼 거리에서 발견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친구는 굉장한 거리에서도 동물을 곧잘 발견해서 나에게 알려준다.
“저기, 사슴이 있어.”
“어디? 어디에??”
“저기 있잖아. 저기 나무 뒤를 잘 봐.”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찾는 동안 동물은 사라져 버리곤 한다.
“도대체 사슴이 어디 있다는 거야... 거짓말 아냐?”
“아니야. 내가 봤다니까.”
이러면서 등산 동안 실랑이를 벌인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이 더러운 성격 때문에 끝끝내 보지 못하고 지나야 하는 그 순간들이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다. 친구가 부러우면서 짜증도 나고 든든하기도 하다. 참 복잡한 감정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곰을 피해 조심스럽게 등산한 적도 여러 번이니 참으로 고마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친구의 시력과 나의 후각, 청각 콜라보는 숲 속에서는 그야말로 천하무적과도 같은 능력이라 생각이 든다.
오감뿐만이 아니다.
다리 근육은 강해지고, 무겁기만 하던 가방은 며칠이 지나면 음식 무게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거의 트레일에서 질주하는 사슴이 된 것처럼 달리곤 한다. 이때가 긴 등산할 때의 또 다른 쾌감이다. 30분씩, 1시간 이렇게 등산 시간을 늘리며 잠깐씩 쉬어야 했지만, 며칠이 지나면 어느새 몇 시간이고 뛰어다니며 등반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미국 친구들은 이럴 때 ‘트레일렉스(Trail Legs)’라 부른다. 속세의 지방을 걷어내고, 근육으로 가득 채워지는 과정이다. 드디어 등반하기 좋은 최적의 몸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 등산이다. 하지만 이런 긴 여행을 통해 평소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백패킹은 나를 시험하고, 가능성을 발견하는 최고의 간단하면서도 힘든 방법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