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틴레이니어 원더랜드 트레일 Wonderland Trail
긴 등산을 하다 보면 여러 감정들을 한꺼번에 느끼기도 하는데 힘들고 짜증 나다가도 기쁘고 만족스럽다가 이내 절망하기도 한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랄까. 마운틴레이니어의 원더랜드 트레일 때의 기분이 등산 코스를 닮아 특히나 그랬던 것 같다.
2023년 장거리 코스를 서치 하던 중 마운틴레이니어 Mount Rainier National Park의 원더랜드 트레일 코스가 눈에 들어왔다. 한겨울 레이니어에 가서 백패킹을 한 경험이 있었는데 여름의 레이니어가 궁금해 그 해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레이니어국립공원은 미국에서 네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워싱턴주 캐스케이드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4,393m의 레이니어가 있는 곳이다. 봉우리는 1년 내내 만년설의 빙하가 덥혀져 있고 눈 덮인 레이니어를 배경으로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과 함께 360도로 산을 둘러 감상할 수 있는 코스가 원더랜드 트레일이다. 트레일은 총 150km로 여유롭게 등산하기 위해 9박 10일의 일정이었고 날짜별로 간단하게 요약하여 정리해 보았다.
차 없이 시작한 백팩킹
⠀
여행 전 백팩킹 허가증 받으러 와일드너스 레인저오피스에 들렸다. 6일부터 레이니어 산에서 야영을 할 수 있는 허가서가 있었던 우리는 전날인 5일 국립공원 입구에서 하룻밤 야영을 시작으로 이번 여행을 시작했다.
⠀
올림픽공원에서 이끼에 둘러싸인 숲을 보며 느꼈던 서늘하고 스산한 분위기는 여기 마운틴 레이니어와도 아주 흡사했는데 아마도 워싱턴주에 있는 산들이 대부분 그런 듯해 보였다. 야영지는 엄청난 물이 흐르는 계곡 옆이었는데 전날에 비가 왔었다는 소식에 무심코 그냥 빗물인 줄만 알았던 이 계곡은 후에 산꼭대기 빙하에서 흘러나오던 얼음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8월 6일
⠀
첫날은 캠핑장까지(Ipsut creek campground) 4.8마일 (7.7km)까지 걸었다. 첫날이라 가방이 가장 무거운 날이기도 했지만, 다행히 코스는 아주 완만한 산책로 정도였고 평탄하고 아주 쉬웠던 첫날이었다.
⠀
이동거리 4.8마일 (7.7km)
걸음수 21,838
8월 7일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한 날이면서 동시에 고생시작한 날이다. 1698m 산 정상에서 구름 속을 걷다가 다시 산을 내려가는데 큰 갈색곰을(털색은 갈색이지만 종류는 블랙베어다) 마주치며 벌벌 떨다가도 흙에 덮혀져 있던 거대한 빙하에 감탄하다가도 1756m 산을 또 타야 한다는 두려움에 다리가 후들거렸던 두려움과 신비로움이 가득한 둘째 날이었다.
캠핑장(GraniteCreek) 도착은 8시. 해 넘어가기 직전에 텐트를 겨우 피칭했다. 등산만 총 11 시간 했던 미친 일정 중 하나였던 날이다.
⠀
이동거리 13.5마일 (21.7km)
걸음수 40,548
⠀
8월 8일
⠀
이날은 날씨가 가장 좋았던 날 중에 하나였고 등산을 시작한 이후 마운틴 레이니어를 가장 깨끗하게 볼 수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전날의 힘들었던 등산여독을 안고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지만 미리 레인저 오피스에 페덱스로 붙여둔 3일 치의 새 음식을 픽업 가는 날이기도 하였기에 음식 픽업 장소가 있는 선착순 우선 카캠핑존으로 힘을 내서 산을 타기 시작하였다.
⠀
카캠핑존은 변기와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마법의 물과 함께 불도 피울 수 있는 여건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도착해서 자리를 잡기로 하였다. 산을 거의 내렸왔을 무렵, 그룹 중 한 명이 두 번째 곰을 봤지만 난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
이동거리 7.2마일 (11.58km)
걸음수 27,191
⠀
⠀
8월 9일
음식을 다시 가득 채우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전날밤에 긴 휴식을 가졌지만 목소리는 이미 갈라지고 콧물이 흐르기 시작함. 등산을 하며 피해야 하는 찬물 씻기를 매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
⠀
땀냄새와 먼지를 덮어쓴 채 잠을 자느니
찬물이라도 사용해서 최소한의 컨디션이라도 유지하고 싶었던 산행 후의 이 버릇은 오래된 습관 같은 거라 대수롭지 않았는데 이번엔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
이 날은 원더랜드 트레킹 코스 중 가장 아름다웠던 코스 중에 하나였지만 원하던 캠핑장을 얻지 못해 우리는 조금 더 먼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
산에서 흐르는 물의 근원이 되는 빙하를 보며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1811m 산을 넘어 몸은 무겁고 피곤하고 다리는 터질 것 같은데 산을 넘어서 몸은 덥고 빙하 때문에 또 춥고 동료 때문에 짜증도 나는데 세 번째 곰도 만나서 무섭기도 하고 또 다른 산을 두 번 더 타야 하는 부담감에 울고 싶었던 정말 많은 감정이 느껴졌었던 하루였다. 하지만 사진은 세상 평화로움 그 자체였던 날…
⠀
⠀
이동거리 16.2마일 (26km)
걸음수 55,237
⠀
8월 10일
⠀
전날의 강행군에 힘든 아침이었지만 10킬로만 내려가는 코스라 느긋하게 아침을 시작한 하루였다.
⠀
며칠째 약을 먹으며 견디고 있었지만 이날은 가래도심해지고 미열과 콧물이 계속 흘렀다. 무리를 한 탓인지 컨디션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날이었던 것 같다.
⠀
일찍 캠핑장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햇볕 아래 계곡물로 씻을 수 있었던 날이었는데 이게 결국 화근이 되고 만 날이었다.
⠀
⠀
이동거리 6.8마일 (10.9km)
걸음수 23,782
⠀
⠀
8월 11일
⠀
저녁부터 어지럽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고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는데 남은 타이레놀을 챙겨 먹고 겨우 산을 타기 시작했다. 산중턱에서 아파봤자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기 때문에 더 아프기 전에 걸을 수 있는 만큼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
결국 동선을 살짝 틀어 파라다이스비지트센터를 들렸다. 센 감기약을 하나 더 사서 챙겼다. 몇 시간을 비지터센터에서 머물며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산을 타서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굉장히 속상했지만 밤에 상황을 지켜보고 더 악화가 되면 산을 내려가는 걸로 결론을 내리고 이른 잠을 청했다.
⠀
⠀
이동거리 7.4마일 (11.9km)
걸음수 30,195
⠀
⠀
8월 12일
⠀
전날 밤 푹 쉬어서 그런지 열은 많이 내려진 상태였지만 미열과 함께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고 챙긴 약을 털어 넣었다. 걸을 수는 있었으나 걸음을 뗄 때마다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해 결국 하루를 쉬기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카캠핑존으로 가서 캠핑스팟 문의를 했다.
캠핑장은 이미 가득 찬 상태였다. 우린 차량도 없어서 병원도 못 가고 신호가 잡히지도 않아서 외부차량을 부를 수도 없었는데 하물며 캠핑장에서 잘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젠장…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공원관리원이 나를 힐끔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원더랜드 트레일 중인데 멤버 중 하나가 아파서 산을 내려온 상황인데 차량이 없다…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진작에 말을 하지 그랬냐며 응급상황을 위한 캠핑존이 있다고 하며 잠시만 기다리면 응급처치도 해 주겠다고 했다.
⠀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는데 친절히 응급처치까지 해 준다니 너무나 고마웠다. 감기인 거 같은데 응급처치라니 좀 거창했지만… 절차가 그렇다고 하니 일단 기다려본다.
⠀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맙소사… 난 그냥 감기라고...
미국에서는 앰뷸런스가 얼마나 비싼지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사를 하고 증상을 설명하며 부끄러운 것도 없이 출동 비용을 내가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해 먼저 물었다. 자기들은 공원 내에 아픈 환자들을 돌보고 병원으로 이송을 하는 일을 맡고 있으며 모든 절차와 비용은 국립공원에서 지원을 해 준다고 했다.
천조국 만세…. ㅠㅠ
⠀
국립공원이었기에 가능했던 도움이었다.
그렇게 생전 처음 앰뷸런스에 누워봤다.
고작 감기라는 명목으로…
⠀
다행히 열은 잡혀 있었고 휴식 말고는 특별히 조치를 할 수 있을 만큼 위급상황이 아니었기에 병원이송을 취소하고 모든 책임을 내가 진다는 확인서에 사인을 한 뒤 응급캠핑존으로 장소를 옮겼다.
⠀
약을 다시 먹고 3시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다.
저녁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잠깐 바람을 쐬었다. 내일은 꼭 나아지길 바라며… 나아지지 않으면 여행을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함께 다시 잠에 들었다.
⠀
⠀
8월 13일
⠀
이른 아침부터 눈을 떴다.
다행히 전날부터 잠을 푹 자고 쉬었기에 몸이 굉장히 가뿐해짐을 느꼈다. 일단 머리가 어지럽지 않아 이동가능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 일찍 등산을 준비했다. 전날에 이동을 멈췄기 때문에 이동하지 않은 거리만큼 늘어난 동선에 걱정이 앞섰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포기하기 싫었던 것 같다.
⠀
이날은 맑은 날씨에 넘어야 할 산만 네 개였다.
(1148m, 1542m, 1681m)
야간산행은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대비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
두 번째 산을 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쉬지 않고 걸어왔기 때문에 이쁜 캐빈이 자리 잡고 있던 두 번째 산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미국여자애 하나가 접근해 왔다. 자신은 혼자 등산 중인데 등산로에 곰이 있어서 혼자 걸어갈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했다. 가능하다면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싶다고 하자 일행 중 하나가 기사도 정신에 자신이 앞장서겠다고 하며 앞으로 나간다.
⠀
미친놈아… 방금 우리 쉬기로 했잖아…
⠀
1분 더 쉬지 않고 또 전진한다.
반대편에서 큰 그룹의 하이커들을 만났다.
⠀
“앞에 큰 곰이 있어.”
⠀
ㅇㅋ…
그렇게 세 번째 곰은 직접 보진 못하고 미국애를 포함한 우리 네 명은 후다닥 두 번째 산을 안전하게 내려왔다. 출렁다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휴식을 갖고 다시 산을 탔다. 갈 길이 너무 멀었다. 차라리 좀 더 아팠더라면 좋았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어버렸다.
이윽고 마지막 산 정상이다. 오는 길에 식수가 부족하여 5킬로를 물도 없이 걸어왔다. 내가 걷고 있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
아직 해는 떠 있었고 산정상에는 멀지만 산양들이 우글거렸다. 양구경 할 시간조차 없이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지만 그때 기억에 5킬로 정도가 남았던 것 같다. 길을 재촉하여 밤산행은 다행히 1킬로만 하고 텐트를 피칭하였다. 발에는 물집이 여러 군데 터지고 다리는 무쇠가 되어버린 이날 우린 총 14시간 업 앤 다운의 30km 산행을 마쳤다.
⠀
이때까지 백팩킹을 하며 이날보다 더 걸었던 날도 많이 있었지만 오르내림을 반복했던 이날의 기억은… 정말 다신 하고 싶지 않은 경험으로 남게 될 거 같다.
⠀
이동거리 18.3마일 (30km)
걸음수 54,007(걸음수 무엇…)
⠀
⠀
⠀
8월 14일
⠀
아침에 눈을 떠보니 다른 하이커들은 이미 짐을 싸서 모두 떠났다. 세상모르고 잤던 어젯밤...
다시 원래 일정 되로 돌아온 우리는 Golden lakes Camp까지 산 하나 정도만 넘으면 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
느긋하게 사진도 찍고 콧노래 불러가며 산을 타다가네 번째 곰을 마주했다. 친구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양은냄비를 치기 시작했다. 소리가 시끄러웠던지 곰이 어슬렁 자리를 피했다.
⠀
이때야 알게 된 사실인데 쇳소리가 나면 곰이 사람이 가까워지니 무서워서 달아나는 게 아니라 쇳소리에 시끄러워 자리를 옮기는 것뿐이라는…
⠀
하여튼,
우리는 이 날 멋진 석양을 끝으로 이번여행을 하루 일찍 마무리하기로 하며 다음날 캠핑장이 아닌 산을 일찍 빠져나오기로 한다. 마을까지는 히키하이킹을 시도하기로 했다.
⠀
이동거리 마일 7.8 miles (12,55km)
걸음수 27,879
⠀
8월 15일
⠀
마지막 날이다. 산속에서의 하룻밤이 더 남은 날이었지만 약속대로 산을 좀 더 타고 일찍 내려가기로 했다.
올라가다 보니 합류점이 나온다. 3.1 mile(4.9km) 남았다. 이제 국립공원을 떠나서 주립공원으로 접어든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끝도 없이 느껴지는 5킬로다.
⠀
드디어 숲을 나왔다.
이 등산로는 주차장이 완비된 곳이니 차량을 얻어 타거나 히치하이킹을 시도해 보자고 한 곳이다.
⠀
맙소사…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내가 생각한 도로가 아닌 비포장에 자갈과 흙이 굴러 다니는 그야말로 흙바닥 길이였고 차량도 하나 주차되어 있지 않은 산 꼭대기였다.
⠀
도착과 트레일을 완주했다는 기쁨도 잠시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이 먼지바닥에 과연 누가 냄새나는 세명의 하이커를 그것도 짐 가득 든 백팩 세개와 함께 태워줄 수 있단 말인가. 히키하이킹을 못하면 그야말로 50킬로의 흙바닥을 더 걷게 생겼다.
⠀
우리는 백패킹 허가서 뒷면에 목적지를 적기로 하고 종이를 꺼냈다. 그때 멀리서 거대한 먼지바람과 함께 승용차가 한대 내려왔다. 이런 산길에 승용차라니 … 일말의 기대도 없이 난 하던 일을 마치려는데
일행이 히키하이킹을 시도하고 성공한다. 맙소사…
⠀
풀린 짐들을 때려 넣고 뛰어갔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 두 청년이었는데 산 위에 있던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고 내려가는 길로 보였다. 맘 바꾸기 전에 얼른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찬송가가 흘려 나왔다.
⠀
할렐루야…
⠀
그렇게 우리 일행 세명은 두 우크라이나 청년들과 아무 말도 없이 차를 1시간 가까이 얻어 타고 근처 타운으로 내려왔다. 차량에서 내린 우리는 고마움을 전한 뒤 도로변에서 한바탕 환호성을 질렸다. 도로 건너편 차량에서 뭘 알고 그런 건지 함께 환호를 해 줬다. 주유소에 가서 아이스크림과 몇 가지 음식, 음료를 샀다. 항상 백팩킹을 마치고 내려오면 아이스크림 흡입은 나의 의식과도 같은 습관 중 하나이다.
⠀
멀리서 마운틴 레이니어가 보인다.
⠀
우버를 불러 타코마 공항으로 가서 차를 빌린 뒤 워싱턴에 다른 국립공원인 올림픽 국립공원으로 짧은 백팩킹을 가기로 한다.
⠀
차량을 빌리고 공원 가서 3일 일정의 백패킹 퍼밋을 받고 옷세탁을 하고 월마트에서 장을 본 뒤 다시 짐을 싸서 해변가 백패킹을 나셨다. 해변가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다. 해변으로 오니 이제야 휴가를 온 듯 편안함이 밀려왔다.
⠀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일을 한 날이었다.
여행을 하면 힘들 때도 많지만 변화무쌍한 상황이 생겨서 늘 새롭고 짜릿하다…
⠀
원더랜드 마지막 이동거리 9.8 miles (15.7km)
올림픽국립공원 이동거리 2 miles(3.2km)
걸음수 33,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