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아빠
에난티오드로미아(Enanthiodromia)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대극반전인데 쉽게 말해서 극도로 어떤 것이 치우치면 그 반대급부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의 예는 일상생활에도 적용이 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조금씩 잘 오르던 주식이 갑자기 급등을 해버리면 그 뒤에 바로 폭락해 버린다던지, 사람 체온이 너무 올라버리면 오히려 그 뒤에 차갑게 식어버린다던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반대 극은 서로 통한다, 즉 시간 차이를 둘 뿐이지 서로 같다는 것이다. 지나친 고통은 굉장한 쾌락의 선행 지표이며, 그 역 또한 성립한다.
육아 얘기에서 대극반전은 적용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 또한 육아 전반에 걸쳐 적용된다. 오늘 글은 그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에게서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지만, 아이에게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아빠다. 나는 아이가 나를 아무것도 아닌 아빠로 여겨줬으면 좋겠다. 이것이 결코 아이가 나를 업신여기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아이가 나를 바라볼 때 특정 이미지로 틀에 박힌 사고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빠는 불같이 화내는 이미지일 수도 있고, 어떤 아빠는 직업도 정치인이며 아이에게 굉장히 권위적인 아빠일 수도 있다. 이와 달리 나는 그것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아이가 나에게 어떤 특정 이미지만을 가지길 바라지 않는다. 아이가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는 정신과 의사나 작가로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나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아이가 느낄 수 있는 나의 모든 것이 전부 아이가 생각하는 나였으면 좋겠다. 어떤 한 이미지가 아이의 뇌리에 나를 잠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뿐인가? 그 역도 성립한다. 아빠인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모습 자체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이가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아빠가 아니다. 나는 아이가 선택하는 길을 존중한다. 아이 속에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모두 아이 그 자체다. 그렇기에 아이는 나를 무언가 바라는 아빠가 아닌 그저 존재하는, 아무것도 아닌 아빠로 인식하게 된다. 물론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가 이런 방향으로 자랐으면 하는 선호는 있을 수 있지만 강제하지 않는다. 혹 강제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글에서도 밝힌 영양과 안전에 해당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러한 아이에 대한 태도가 가져다주는 영향은 대극반전을 불러일으킨다. 즉, 나는 아이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아빠임과 동시에 무엇도 될 수 있는 아빠가 된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아빠이며, 아이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아빠가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결코 초라한 것이 아니다. 낡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진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겸손이다.
그렇기에 부모들이여 혹 다음과 같이 아이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 보라.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한테 이렇게 해주는 건 아빠(엄마)밖에 없다."
“내가 아빠(엄마)여서 이렇게 해주는 거야.”
이런 표현들은 아이에게 특정 위치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부모의 소망을 나타낸다. 우리 부모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아이가 있음으로, 아니 부모 그 자신으로도 온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에게 부모의 헌신을 드러내며 특정 이미지를 강제하는 행위보다는 아이에게 행하는 부모의 한없는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결과는 무한한 사랑으로 당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