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허씨는 친구들과 함께 군대에 지원한다. 그런데 이게 왠 걸. 친구 놈이랑 같이 지원한 군대인데, 다른 부대에 배치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복무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허씨에게 군대는 너무 힘들었다. 못 배운 것 같은 놈들이 천지 삐까리였다. 그놈들에게 뭐라 대꾸도 할 수 없는. 하 사회에 나가면 저 치들은 다 내 발밑에 있을 것인데. 그런데 지금은 허씨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하늘 같은 상병님들의 지시에 허씨의 신경은 날로 날카로워져만 갔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불면도 야간 보초를 서면서 겪어봤다. 분명 몸은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누구 하나 심하게 갈구는 것은 아닌데, 언제든 날 갈굴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날이 서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일병을 달고,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허씨의 군 생활은 다소 익숙해져 갔다. 다소 평탄해진 일상 속에서 군 생활은 익숙해져 간다. 일병이 끝나갈 때쯤 되자 군대가 내 집같이 느껴진다. 계급이 올라갈수록 야간 보초도 점점 줄고 신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상병이 되자 군대가 편하다. 이렇게 있다가 제대하는가 싶다.
제대하면 뭐 하지?
허씨는 생각한다. 허씨의 경우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가족처럼 지내는 분대원들의 경우는 그게 아니었다. 일을 하다가 온 녀석, 놀다 온 녀석, 그러다가 정신 차린 녀석, 사업을 생각하는 녀석, 아직도 공부를 준비하는 녀석, 수능을 다시 보는 녀석 등 천차만별이었다. 심지어 아버지 농사를 돕겠다는 사람도 봤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구나 싶었다. 개중에는 오기 전에 주식이나 코인 투자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놨거나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 정도는 되어서 걱정 없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그냥 자신보다 못해 보였다. 그래서 허씨는 안심했다.
그래 나는 뒤쳐진 게 아니야. 세상엔 나를 깔아주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이 있는걸.
허씨는 생각했다. 그 당시의 허씨는 그저 수능 점수로만 사람을 판단하는데 아직 익숙해 있던 터였다. 허씨의 수능 등급이 3등급이면 허씨 아래에는 70% 정도의 사람이 산재해 있을 터였다. 군대에서도 보니 그 비율은 비슷해 보였다. 열명 중에 한 두 녀석은 나보다 처지가 나아 보였고, 나머지 예닐곱은 나보다 처지가 낮거나 비슷해 보였다. 그걸로 되었다. 허씨는 익숙해지고 나른해지는 군 생활의 위안을 그런 비교에서 찾았다. 속으로 비교하고 비교하고 그러다 보면 긴긴 작업시간이 금방 갔다.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그냥 복학하는 것으로 정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들어간 대학교인데 그냥 다녀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군대에서 보니 대학교 안 다니는 녀석들의 생활은 대부분 난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도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물론 대학교 안 다니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허씨는 복학을 결정하고 전역을 한다.
복학! 복학을 앞둔 허씨의 머릿속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군대를 전역할 때만 하더라도, 내가 이런 군대 생활도 버텨냈는데 뭔들 못하리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복학을 하려니까 그게 아니었다.
복학생 냄새가 나면 어떻게 하지? 아저씨 느낌이 나면 어떻게 하지?
그런 기분을 잠재우기 위해 최대한 꾸며보려고 했지만 허씨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 몇 번은 꾸미고 가더라도 계속 옷을 그렇게 입을 수는 없었다. 어느새 허씨 주변에는 남자들만 득시글댔다.
대학교가 연애하러 가는 거냐 공부하러 가는 거지.
허씨는 그렇게 다시금 자기 합리화를 했다. 복학한 남자 동기들과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입생 남학생 후배들이나 여자 후배들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아예 마주칠 거리가 없는 것 같았다. 조별 활동도 남자끼리, 과제도 남자끼리.
그나마 1학년 때가 여자랑 마주칠 일이 있던 거였구나. 그때 잘할걸.
허씨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열차는 출발했다. 허씨는 23살 2학년, 주변에는 21살 2학년. 개중에는 복학생 중에도 잘생기거나 돈 많아서 차를 몰고 다니는 친구들에게는 여자애들이 꼬였다. 허씨는 그런 복학생들을 보면 생각했다. 저 치는 운전기사도 아니고 여자애들이나 태우고 다닌다고. 허씨는 그렇게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이 되자 2학년에 비해 공부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제 4점대 학점은 고사하고 3점 대도 중간에 머물기가 쉽지 않아 지는 느낌이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알바는 할 틈이 없었다. 어머니가 주시는 용돈으로는 집 학교 집 학교를 반복할 수만 있었다. 어차피 돈도 시간도 없었다. 그냥 이런 생활이 편했다. 지방에 사는 친구들은 주거비가 나가는데 자기는 조금 멀긴 해도 집에서 통학해서 돈을 많이 안 쓰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이랑 학교가 모두 서울에 있어서 감사했다.
4학년은 취업 준비에 바빴다. 그런데 웃기게도 여자친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4학년 때다. 허씨가 취업 스터디 준비를 하게 되면서 만나게 된 여자다. 전혀 그럴 줄 몰랐는데 스터디 준비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그렇게 예쁜 여자친구는 아니었지만 참한 스타일이었고, 취업 준비를 성실하게 하는 모습도 1학년 때 봤던 여자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렇게 둘은 취업 준비와 연애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게 되었다. 여자친구와 함께여서 취업 준비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먼저 취업에 성공했고, 뒤 이어 허씨도 적당한 기업에 취직을 했다. 누구든 이름을 대면 알만한 그런 기업 말이다. 비록 해왔던 전공과 연관성은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되었다. 원래 적성에 맞던 과도 아니지 않았는가? 일은 가서 새로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회사 네임벨류가 있으니까 괜찮았다. 거기에 여자친구도 응원해 주었다. 대학교 다니는 모든 시기를 통틀어 허씨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제 취업도 했겠다 여자친구와 함께 장밋빛 연애를 즐기는 청춘만이 남았을 것이라고 허씨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