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허씨에게도 꿈이 있었다. 허씨의 꿈은 아버지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허씨는 성실했다. 공부도 못하지 않았다. 아니, 잘하는 편이었다. 반에서 중상위권, 때로는 상위권까지 갔다. 집안 형편이 빠듯해서 사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다니고 싶은 학원은 다닐 수 있었다. 정말 힘든 고등학교 3년이었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면서 무사히 수능을 치렀다. 논술 같은 것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목표였던 서울에 있는 대학교 안에 들어가는 것은 이루었다. 기뻤다. 그렇게 수업시간에 자고 놀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제 멀리 지방까지 대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자신은 조금 멀긴 해도 지하철 타고 다닐 수 있는 대학교에 가지 않았는가? 아버지도 막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들이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허씨가 가장 난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대학교 이름을 말했는데 엄마 친구들이 그 대학교 이름을 잘 모르는 상황은 면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허씨가 그 대학교에 간 것을 막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가 물어보면 흔쾌히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그걸로 괜찮았다.
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친구 중 공부 잘하는 놈은 대학교 타이틀 팔아서 월 40-50씩 과외로 편하게 번다는데, 이 대학교 타이틀 가지고 과외는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힘들었다. 그리고 학교 공부랑 병행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몇 개월 하다가 그냥 방학에만 하기로 하고 그만두었다. 돈 버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용돈으로 주는 40만 원을 아껴 쓰면서 학교에 다녔다. 연애 같은 것은 꿈도 못 꿨다. 한 번 데이트하면 몇 만 원은 그냥 나가는데, 나머지 식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학교 중앙식당에서 주는 3천 원짜리 학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때때로 학식에 돈가스가 나오는 날이면 줄을 서서 먹으면서 공부했다.
대학교 공부는 쉽지만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알아서 다 떠먹여 줬는데. 과목 자체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 어느 정도 파면 익숙한 정도였다. 그런데 이 대학교 공부라는 것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자세한지? 그냥 대학교 공부에, 아니 이 과목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들어보는 과를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교, 갈 수 있는 성적에만 맞춰 온 것이니까. 예전에는 이 과 이름이 다른 이름이었다고 한다. 농경대인지 무슨 화학부인지 그런데 지금은 이름도 화려하게 바뀌어서 학과 이름을 외우는데도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말하면 친구들이 무시하는 반응은 아니어서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그러면 뭐 하나? 배우는 것은 고등학교 때 배웠던 과목과 동떨어져 있다. 그냥 배우고 외우고. 그리고 시험 치고. 다행인 것은 고등학교 때처럼 적당히 성실하게 하면 중간 정도의 학점은 나온다는 것이었다. 같이 하는 조별과제가 다소 짜증 나긴 했지만, 그런 경우엔 그냥 내가 손해 보더라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간 학점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기분은 많이 상했지만, 적당한 학점을 보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은 되었다. 아, 어떤 친구들은 조별 과제를 하면서 여자친구도 사귀고 한다는데 나는 왜 그런 것도 없는지. 생각해 보니 조별 과제를 하면서 조원들을 많이 다그치고 귀찮게 한 것 같기는 했다. 그러면 뭐 하는가? 제대로 조사도 안 해오는데. 그런 여자들이랑 사귀느니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며 자기 위안을 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받아 든 첫 학기 성적표는 장학금은 어림도 없을 정도지만, 그래도 3점 중반대를 넘어 후반대에 가까운 점수였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나랑 같이 다니던 친구는 맨날 미팅하고 노는 것 같은데도 4점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 친구도 장학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다. 그 친구는 그냥 공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 과가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맨날 노는데도 과제는 점수가 늘 좋았다. 나도 적성에 맞는 과나 갈 걸 그랬나? 근데 생각해 보니 적성에 맞는 과가 뭔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적성은 대학교 가서 찾으라고 하던 선생님들 말씀.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 책 읽으면 와서 뺏어가던 선생님들. 그런 환경에서 적성을 어떻게 찾는가. 그렇게 또 자기 합리화를 해 본다. 그러면 지금에라도 찾아볼까? 그런데 웃겼다. 적성 찾고 수능을 다시 치려면 1년 반은 더 허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들은 벌써부터 1학기 끝나고 군대 간다는 친구도 있다. 군대 갔다 오면 20대 중반인데, 거기다 다른 학교까지 옮기면? 군대에서 나이 적인 놈들에게 상명하복 하긴 싫었다. 그래 뭔 반수냐. 지금 사는 것도 팍팍한데. 결정적으로 허씨의 마음을 돌린 것은 엄청난 재수학원 수업료, 인강비 등등등. 엄마한테 또다시 등골 브레이커가 되긴 싫었다. 이미 대학 등록금도 내 알바비의 몇 배는 냈는걸. 지금 배우는 수준으로 만족한다. 취업은 되겠지 어떻게든. 허씨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