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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04. 2019

어쭙잖게 '평등'을 들먹여 본다

 매튜 워처스 <런던 프라이드>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이 글은 마감을 못 지키고 매우 뒤늦게 올립니다 흐잉 )

* 12월의 주제는 [혐오와 연대]입니다!


*12월 주제 [혐오와 연대] 업로드 일정표

- 12월 5일(수)    『민트의 세계』, 듀나(2018)

- 12월 12일(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장 마크 발레(2013)

- 12월 19일(수)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2018)

- 12월 27일(수)   「런던 프라이드」, 매튜 워처스(2014)




0. 우리는 그동안 ‘선’을 무척이나 쉽게도 넘나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폭력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그 선을. 잘못인 줄도 몰랐다. 애초 우리는 그 선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겨 먹은 지조차 몰랐으니까.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서부터가 아닌 지도 모른 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잘도 넘어갔다는 말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다. 동성애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는 여전히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금지선이 어디인지 모른다.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아요. 성적 지향이 다른 건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쉽게들 말하지만, 구체적인 동성애를 일상에서 마주하면 쉽지 않다. 어떤 질문이 실례인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어떤 게 편견이 없는 자연스러운 태도인지를 잘 모르니까.


그래서 평등을 ‘감히’ 말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계속해서 말하려고 애써야 한다.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또 다시 염치없이 ‘감히’ 평등을 들먹인다. 성차별에 관대한 사회에서 남자로 태어났고, 가부장제의 공기를 매일 마시며 살아가고, 중산층 부모님의 돈으로 편하게 ‘평등’을 ‘공부’해온 내가, 어쭙잖게라도 ‘감히’ 평등을 말해야만 한다.




1.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감히’ 평등을 말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영화다. 영화는 뻔하게도 ‘연대’를 말하지만, 우리가 쉽게 상상하던 연대와는 결이 다른 연대를 말한다는 점에서 뻔하지 않다. 연대할 수 있는 사람과의 연대가 아니라, 연대를 상상할 수 없는 누군가와의 아슬아슬한 연대이기 때문이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연대가 아니고, 광부와 노동자의 연대가 아니다. 동성애자와 광부간의 연대이며, 비유적으로는 페미니스트와 한남 아저씨 사이의 연대이기도 하다.


‘동성애자에게 도움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굶는 게 낫다’는 광부 아저씨들을, 동성애자들은 왜 그토록 돕고 싶었던 걸까.


앞으로 그 광부들이 겪을 소수자로서의 ‘아픔’을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클로짓(벽장) 게이인 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게이로 보일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동성애자 역겹다’고 말하고 지나가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부정당하고 스스로를 지워야 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광부의 아픔을 상상할 수 있다. 언론에게, 공권력에게, 다수자에게 희생당하고 생존을 위협받는 광부들의 목소리가 그들에겐 들리는 것이다.


이 연대를 막는 양쪽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동성애자 중 누군가가 “그럼 우리가 당할 때 광부들은 뭘 했는데”라고 말하는 것도, 광부 중 누군가가 “게이들이 오면 병이 걸릴까봐 위험하고, 무엇보다 그들은 문란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동안 우리 일상에서 수없이 들어왔던 얘기들이다. “내가 남성인데 페미니즘을 왜 지지해야 하는데?” “나는 여성 평등을 원하는 거지 틀딱들의 권리는 내 알 바가 아니야” “게이 극혐!”


<런던 프라이드>는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을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말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사회의 억압적인 분위기까지도 담아낸다. 편견에 저항하는 의견을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묵살하는 그 분위기를.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말하는 션의 남편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게이들을 거부한다.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광부 입장에서, 이미 성적으로 문란하고 위험한 존재로 사회적인 낙인 찍혀버린 게이를 편들면 광부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편견 앞에서 침묵을 택한다.




2. 그래서 어렵다. 소수자(이자 사회적 약자)끼리도 서로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이미 그 편견들이 득실거리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재현된 ‘현실’에서 눈을 돌려 내 진짜 ‘현실’을 바라보면, 더 엉망진창이다. 연대를 제안하기는커녕 연대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에게 여전히 무엇이 차별적인 말인지조차 모르고, 무엇이 피시(PC, 정치적 올바름)하고 열린 태도인 줄 모른다.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다. 누군가에겐 고마운 질문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불쾌할 수 있고, 누군가에겐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 행동이 누군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닐지라도 ‘감히’ 평등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자연스레 익숙하고 편한 걸 추구하며 늙어갈 테고, 어떤 범주에선 평생 소수자일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노동자권리를 주장하면서 여성의 권리를 외면하고, 게이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광부의 권리는 외면하는 게 ‘비논리적’이라는 마크의 말처럼, 우리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3. 그래서 얕은 글로나마 ‘감히’ 평등을 얘기해 본다. 영화 속 노래 가사처럼, “우리의 삶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태어날 때부터 숨이 다하기 전까지” 그럴 생각이다. 그 대상이 ‘그 누구든’지 간에 말이다. 실패할 지라도, 누군가에게 분명히 남는 것들은 있을 터이니.


"당신보다 크고 강한 적을 만났을 때,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지원군을 만난다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겁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지원군. 그 지원군이 되자. 서로가 서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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