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아파하는 일

박서원, 『아무도 없어요』

by 느슨한 빌리지

엄마,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모녀가 모처럼 기분 내서 손 잡고 백화점에 왔다. 회전문을 밀어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 엄마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니 집에 돌아가자고 말한다. 딸은 이해할 수 없다. 둘다 예쁘게 꾸미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간다니. 그렇지만 딸은 엄마가 몸이 예민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해심을 발휘해 조금 쉬었다가 들어가자고 말한다. 자신은 기다릴 수 있다고. 기다리겠다고. 딸의 타이름은 거듭된다. 엄마는 그러나 들어가지 못한다. 서로에게 속상해하지는 않지만 서로 속이 상한 채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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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겠지만, 그 딸이 나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자주 아프고 자주 잠을 설쳤다. 오랜 시간 폭력에 시달리면 누군가 허공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움찔거리듯, 엄마는 작은 변화에도 멈칫거린다. 외출 전 혈액순환제, 심장약, 소화제, 사탕, 엿, 보온병, 카디건이 잘 들어 있나 확인한다. 아픔은 아픔을 둘러싼 불안과 함께 무거워진다. 그러니 엄마와 함께 다니기란 쉽지 않다. 계속해서 살펴야 하고 자주 멈춰야 하고, 그보다 더 자주 나의 이기심을 마주해야 한다. 그래도 그 동안 나 나름 엄마의 아픔을 이해하고 배려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불안해하는 마음만은 알 수 있으니까. 나도 곁에서 같은 폭력을 버텨왔으니까.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아니 그러므로, 『아무도 없어요』를 읽으며 마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가 그럴듯하게 조금씩은 연기를 잘해내지만 내 연기는 특별한 데가 있어. 가족들과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모아 비난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 내가 아무리 아파서 발버둥 쳐도 동생은 신나에 뿌려진 불덩이처럼 미쳐 날뛰는 "쇼"라고 말하고 동네에서는 망나니라고 혀들을 차거든.

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 태양과도 같은 판토마임을 향해서 속력을 내는 건지도.

한 번도 내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것. 이 천형을 미치광이라니.

"쇼"라니.

"쇼"라는 게 별 게 있어. 보여지는 게 "쇼"지. 사실 무대와 현실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도 아냐. 위치에 따라서 모양이 바뀌어 보이는 의자와 걸상의 관계지. 혹은 양말과 장갑의 관계.


─ 박서원, 「판토마임」 부분



지금은 이름도 위치도 기억나지 않는 백화점 회전문 앞에서, 그리고 함께 멈추었던 수많은 순간, 엄마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실제로' 아픈 것보다 아파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쉬는 동안 엄마가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며 '과잉' 반응하고 있음을 깨달으리라 믿었다. 심호흡하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타일렀다. 엄마 스스로 수 만번 타일러도 "한 번도 내 자신을 속이지 못"한 아픔을 "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이시여. 제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라는 진부한 "무대" 대사는, 엄마에게 "현실"이었다. 벌("천형天刑")이 아니라면 이렇게 아플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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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떤 경험을 통해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출근하려고 일어났는데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어지러워 병원에 갔다가 전정신경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주요 증상은 극심한 두통과 어지럼증. 원인은 균형 감각을 담당하는 전정 기관의 이상. 무서웠다. 멀쩡하게 걷기 어려우니 집이 아닌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두려워졌다. 내가 어떻게 걸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코에서, 귀에서, 머리에서 심장이 뛰었다. 울렁이는 바닥 위, 의지할 수 있는 건 손에 잡히는 벽, 기둥, 약뿐이었다. 공황장애가 아니어도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공황 증상을 보일 수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백화점 앞에서 내 손을 잡고 가만히 앉아있던 엄마가 떠올랐다.



버스를 탔어요. 갑자기 그 증세가…… 그만 손잡이를 놓쳐버렸어요. (중략) 두려움이 두려움을 잡아먹었어요. 절대로 혼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타일렀어요.


내려야 할 곳이 어딘지 알 길이 없었지요.

몽당연필, 멍울진 다리가 한꺼번도 아니고 조금씩 잘려나갔어요. 해진 커튼이 펄럭거렸어요. 봉지에 모아두었던 꽃씨들이 지천으로 흩날리었어요. 어항이 깨졌어요. 분노. 그래요. 분노. 현실이었어요. 꿈이었어요. 아아 시체처럼 파먹혀들어가는 하늘,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어요. 누군가의 따스한 손이 내 어깨를 부축했어요.

나는 조용히 내 울음을 즐겼지요.


─ 박서원, 「안구회전증」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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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태양을 찬미할 수 없게 되었지 건강을 집요히 추적했지만 12시간을 자야 정상인 나에게 세상은 무리였어 이파리 한 조각도 무거워 항상 헐렁한 걸 원했지 누구나가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지만 난 그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제기랄, 근데 실패하고 말다니 연습이 아니었는데도 그건 살아있는 파멸이었어 검은 밧줄, 괜찮은 유희였는데도 말야

(중략)

어처구니가 없지 당신들, 무더기로 비난하지 마

아가리가 커다란 검은 동굴, 날아다니는 박쥐 떼 그따위 상투적인 죽음 이미지 말고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는 나의 죄를 물어줘


─ 박서원, 「실패」 부분



엄마는 항상 약을 챙기고 수시로 병원에 드나들며 "건강을 집요히 추적"하지만, "누구나가 살아가는" 세상을 누구나처럼 살 수 없다. 예쁘게 차려 입은 옷이 아쉬워 회전문을 밀 수 없고, 올라온 길이 아까워 언덕 끝까지 오를 수 없고, 어깨가 아파도 짐을 덜 수 없고, 땀이 차도 양말을 벗을 수 없다. 나에게는 쉬운 일이 엄마에게는 결코 쉽지 않다. 그때 느꼈다. 나는 엄마 곁에 있었지만, 엄마 곁에는 아무도 없었구나. "무언가가 있을 것 같"고 "누군가 나를 채워주려" 올 것 같은 기대는 친절한 비난(타이름)으로 버려졌구나("그러나 역시 아무도/안 와요.")(「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를 쓴 박서원 시인은 폐결핵으로 일찍 숨을 거둔 아버지의 이력과 예민한 천성으로 젊은 시절부터 발작과 기면증을 앓았다고 한다. 이런 내막을 모르더라도 시를 읽으면 시인의 아픔과 슬픔이 몸과 마음에 스민다. "냉장고에 머리를 쳐/넣(「두통」)"고 싶을 정도로 아파 스스로를 "모태부터 저주받은 몸뚱이(「학대증 2」)"라 부르고,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괴로워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이젠 긴장을 풀어도 좋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무색해지는(「나의 호텔」)" 죽음을 그리는 아픔이.

하지만 아파서 슬프거나 슬퍼서 아프지 않다. 그저 아프고 슬프다. 아픔에 슬퍼하거나 슬픔에 아파하기보다 아픔에 아파하고 슬픔에 슬퍼진다. 말장난 같지만, 우리는 안다. 어떤 감정을 그대로 감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 이곳에 타인의 아픔에 연민을 표하고, 타인의 슬픔을 내 것처럼 소비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나는 이제 엄마에게 기다린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대신, 엄마가 멈출 때 함께 멈춘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오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곁에 가만히 있는다. 기다리겠다는 말 없이 기다린다. 엄마가 아닌 내가, 엄마의 아픔에 아파하기를 기다린다. 엄마와 마주 눕기로 한다. 누군가 있다고 느끼도록.




이미지 출처: unsplash

당신과 내가 마주 누우면



1

당신과 내가 마주 누우면

소나기 한 번 내리지 않던 유년의

여름과

잃어버린 크리스마스의 겨울이

되돌아온다


당신과 내가 마주 누워 숨 쉬면

닭이 세 번 울기 전

베드로가 마셨던 포도주가

서쪽 창에 노을로 번지고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천국이

거기 벌판으로 자라난다


벌판에는 어느덧

소리 없이 흔들리는 동백꽃이

외로움을 빛내주고

거기 그 계절 위에는

새가 둥우리를 치며 운다


2

우는 새들이

알의 잠을 깨우는 동안

당신과 나의

시간은 가고

당신과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어느 파토스의 강물 대신

가지런한 미래를 열어놓고

기다린다


닭이 세 번 울고서 후회한 베드로의

눈물이

이제는 포도밭을 영글게 해

벌판은 당신과 나뿐만 아니라

모든 비밀을 불러 모은다




(쓰고 나니 엄마가 불치병 환자처럼 느껴지지만 엄마는 건강한 편이다.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을 뿐. 하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 없는 경우가 더 어려운 법. 엄마의 아픔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 소개한 시집: 박서원의 『아무도 없어요』 http://www.yes24.com/24/goods/41134371
'연연의 다정한 시(詩) 읽기'는 시(詩)를 빌어 일상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시 일기'이기도 합니다.
격주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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