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인 경험과 인맥이 만들어준 Plan C
복합적인 이유로 얼마전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기회이고 경험이었지만 지속하기엔 체력도 열정도 다 타버린 번아웃 상태였어요. 번아웃이야 어떻게든 쉬면서 채우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가장 컸던건 너무 예쁜 아들(태경이)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건강이 안좋아졌다는 거였어요. 살도 찌고 몸이 좀 않좋아졌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건강검진 면담에서 (술을 거의 먹지 않았는데) 간수치가 2배, 고지혈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퇴사고민은 하지 않았습니다.
10년 뒤를 되돌아봤을 때 엄청난 부를 이룬다고 해도 태경이와 보내는 시간, 망가진 몸은 돈으로 되돌리기 힘들겠단 확신이 들었어요. 그렇게 아기 돌이 채 2달이 남지 않은 시점에 퇴사를 했습니다.
사실 걱정이 크게 들진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이자비, 생활비. 그리고 장난처럼 얘기했던 분유값과 기저귀값까지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나마 그동안 쌓아온 경험에 대한 자신감이랄까요, 무슨 일을 하든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워낙 전직장에서 하드워킹을 했던게 큰 자산이 되긴 했어요.
그렇게 결심한 뒤 회사에 퇴사의사를 전달하고, 찬찬히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봤어요.
스스로 부끄럼없이 잘 해낼 수 있는 일이 뭘까?
사회생활, 학창시절을 복기했을 때 관통하는 2가지는 '기획'과 '실행'이었어요. 생각을 구체화하고 실행하는 일. 당장 떠오르는 친구는 행사기획일을 하고 있는 지인이었습니다. 갑작스럽지만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라고 물었을 때, 흔쾌히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서로가 봐왔던 몇 년의 기간동안, 일에 대한 마인드나 실력은 서로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인 관계였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생계는 어떻게 되겠다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 어떻게 '나라는 사람'을 팔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퇴사를 한다고 했을 때, 혹자는 '너가 지금 나이에 나가서 어디 스타트업도 이제 들어가기 힘들다'라는 말을 했어요. 어중간한 나이와 포지션으로 좋은 회사 들어가긴 힘든게 현실이라 일리있는 말이긴 했습니다. 더욱이 저는 부산에 있기에, 좋은 일자리가 제한된 지방에던 더욱 냉혹한 현실이죠.
기존 커리어 방식을 따라가기 싫어서 스타트업을 선택했지만, 스타트업 역시 엄연한 룰이 있는 직장이고 성장을 하기 위한 조직이었습니다. 괜한 반항심이란게 생겼습니다. 예전처럼 회사에 '정해진 포지션'을 구하는 구직자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업무단위'를 구해서 하자.
내가 일하길 원하는 시간과 방식을 정하고
나의 영역안에서 좋은 결과물을 보여주자.
'넌 뭘하는데'라고 얘기했을 때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표현하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로컬기획자'라는 명칭을 쓰고 있지만, 직관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한 전달은 부족해서 좋다고 할 수 있는 네이밍은 아니었어요. (네이밍부터 훅! 들어오지 않으면 이거 나가린데...) 프로젝트 안에서 제 영역을 잘 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할 지 도무지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 프리워커였네?
MoTV 유튜브 채널 초창기에 너무 재밌게 봤었는데, 퇴사후 정주행을 하면서 그사이 진행했던 모베러웍스의 프로젝트를 보며 큰 자극을 받았어요. 그리고 최근에 나온 그들의 책(Free Workers, 프리워커스)을 읽으며 일에 대한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마인드와 상태기 때문에 네이밍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까짓거 분명하지 않으면 어때.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은 알아봐줄거야.
흥미로운 사람, 매력적인 동료가 되자
잘하는 역량에 집중하되,
일하는 방식과 영역에 경계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 둘 생각이 정리된 후, 주변 지인들에게 프리선언을 했어요. 페이스북으로도 열심히 알리고요.
처음엔 당장 생활비라도 벌자라는 생각이었어요. 퇴사한지 보름차가 안된 지금, 운이 좋게도 (진짜 영역에 상관없이..) 여러 일이 들어와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프리워커로 일을 하면서 시간에 대한 자유로움은 있지만 다음 일을 생각하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기에 더 절실한 마음으로 노력을 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일'을 하더라도 예전보다 주체적으로, 효율적으로 몰입하게 되니 에너지가 소진되기 보다 충만한 느낌이 큽니다. 그리고 평소 보지 못했던 책과 공간, 행사를 다니며 '인풋'이 늘어나니 더 많은 영감을 받게 되고요.
무엇을 할 지 모르는 두려움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퇴사할 땐 정말 Plan B도 없이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건, 나름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는 나만의 무기들이 이제는 생겼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안해본 영역이더라도 일을 되게 만드는 요소와 맥락은 비슷하기 때문에 배워나가면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 불타고 있는 열정이 언젠가 식을 때가 올 때, 그때 다시 '나는 퇴사하며 어떻게 다시 시작했었나'를 복기하며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이렇게 글을 남겨봅니다.
-로컬기획자, 한스의 포트폴리오: 한스네버슬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