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 자체가 모순
잠깐 모순 이야기로 돌아가자.
케니를 첫 번째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그는 흑인이다. 그럼 내가 흑인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큰 이유는 없었다. 그냥 이 이야기에는 당연히 흑인이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피부색의 문제를 담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흑인이었다. 당연한 것처럼 미국의 빈민가를 떠올렸고, 그 안에 살아가는 흑인 소년을 떠올렸다.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두가 알고 있고, 느끼고 있지만 쉽게 입 밖에 꺼내기 힘든 이야기. 글을 쓰는 나도 불편하고 글을 읽는 당신들도 불편한 이야기. 그럼에도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누군가는 계속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 평생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흑인 그리고 직접 겪어본 적 없는 인종의 문제를 내가 말할 자격이 있을까? 이 이야기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약자가 선이 되고 강자가 악이 되는 뻔한 이야기에 중독된 세상.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현실. 결국 자신의 약함을 드러낸 이유가 강자가 되기 위함임을 알고 있지만 그 마저도 숨기려 한다. 그리고 욕망에 눈이 먼 자들의 마지막 발악.
'이게 현실이다.'
케니는 약자로 그려진다. 그리고 성공하기를 갈망한다. 세상의 모든 거친 환경을 겪는다. 거리에서 친구가 죽는 것에 익숙하다. 밤마다 울리는 총성이 익숙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익숙하다. 가난을 품고 태어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헛된 희망을 노래하는 것에 익숙하다. 거리에서 태어난 한 명의 빈민가 흑인으로 사는 삶에 익숙하다. 그리고 케니는 선한 사람과 강자가 되는 갈림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무엇이 옳은 길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 생각의 마침표는 찍히지 않고 모순이라는 문 앞에서 주저앉는다. 결국 가장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낸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
과연 피부색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 그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정답이 아닌 핑계를 찾을 것이다. 나약한 존재가 되어 약자의 편에서 안정을 찾고 싶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약자에게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내며 자신이 강자가 된 느낌에 희열을 느낀다.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모순덩어리로 살아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되기에 이미 생각을 멈춘 사람들은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갖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고통 속에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케니를 내세웠다. 약자를 증오하고 강자를 비판한다. 모순에 둘러싸여 자신조차 모순이 되어버린 존재.
"아버지의 사인이 약물 과다 복용인지 총격으로 인한 사망인지 뺑소니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인지 아니면 그럴리는 없지만 살만큼의 나이를 먹고 자연사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에게 아버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누가 흑인 한 명이 죽은걸 대단히 여기겠는가? 그들도 이 이야기가 끝나면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