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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플리 Jun 17. 2018

질문의 후예

2018, 문제제기에 대하여


 


 

어린아이는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이것은 뭐냐, 저건 뭐냐 하고. 또 왜 그래야 하냐 묻는다. 부모는 귀찮은 내색 않고 성심껏 대답한다. 어디까지나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아이이니까. 자랄수록 아이들의 질문은 현저히 줄어든다. 부모의 대답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자랐으면 알만한 것은 철들어 납득하고 더 궁금한 건 학교에서 해결하길 바란다. 그러나 대체로 학교도 질문을 던질 곳은 아니다. 바통을 이어받지 못한다. 


그렇게 자라 성인이 되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 부적응자, 낙오자가 되긴 싫으니까, 도태될 수 없으니까 숨 가쁘게 하루하루를 힘써 살아간다. 개인이 공고한 시스템 안에 하나의 구성원이 되는 과정에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의문과 물음이 발생한다. 소위 청춘이라 불리는 이들은 누가 먼저 이 모든 물음표를 완벽히 억누르는지 보여주려는 듯 무섭게 달린다. 상사, 선배, 부모라는 이름의 모든 사회는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 가운데 질문을 던질 곳은 없다. 


눈을 가리고 경주마처럼 달리다 보면 점차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아간다. 생계를 꾸리고 가족을 만들고 누군가를 마음 편히 할 경제력, 사회적 인정과 스스로의 안위, 심리적 만족을 주는 자아실현, 나아가 꿈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나날이 견고해지고 무너질 수 없는 사령탑이 된다. 이쯤 되면 질문의 필요성은 거의 사라진다. 


누군가의 허영과 또 누군가의 밥그릇, 손잡을 수 없는 것들이 만나 사회를 이루었다. 욕망을 채우려 광산을 만든 이와 배를 채우려 깊은 땅 아래로 들어가기를 자원한 광부들처럼. 그때로부터 엎치락뒤치락했지만, 결국 달라질 것 없이 같은 모습이다. 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광산이 가져온 무수한 생명의 희생과 유용하지 않다고 여겨져 파괴된 모든 광물의 결정에 대하여. 과연 그것은 잃어 마땅한 것이었는지, 권력과 자본 아래 누군가의 삶은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인가를. 다이아는 진정 어디에 있는지를. 


아이는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만약 아이도 질문하는 것을 질책당한다면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더라도 물음에 답해주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질문할 것이다.  모두 언젠가 작은 것을 질문하는 어린아이였고, 답해주는 어른일 테니까. 


질문하는 이가 많아지면 누군가에게는 적잖이 성가신 일일 것이다. 진실을 답할 생각이 없는 이들, 개인이 없는 사회라는 틀을 만든 이들이다. 의문을 가지는 이도 피곤해질 수 있다. 그럴수록 더욱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싸워야 할 링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다이아와 번드레한 외양을 위하는 대신,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하여. 

진실이길 원하는 것을 믿는 대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두둑한 배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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