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의 세계
바야흐로 김장의 계절, 11월이다.
언제부터 11월이 나에게 김장의 달이 되었을까.
벌써 10년 전, 결혼 준비로 정신없던 날들 속에서 시어머니께서 꼭 사야 할 가전이 있다며 말씀하셨다. 그건 다름 아닌, 김. 치. 냉. 장. 고였다.
솔직히 나는 김치를 많이 먹지 않는다. 김치는 라면과 함께 잠시 스치는 파트너 같은 존재일 뿐. 밥상에 없어도 큰 차이는 없다. 게다가 맞벌이라 집에서 밥을 먹는 일도 드물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시댁의 이야기는 달랐다. 김치 없는 밥상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부모님에겐, 김치냉장고가 없는 삶은 고요히 텅 빈 겨울 같았을 것이다.
우리 집은 각자 김장해서 가져가는 시스템이야.
너희 먹을 건 너희가 담아 가야 해.
그리하여 나는 그렇게, 김장의 세계로 내던져졌다.
김장 대작전, 그 긴 여정의 시작
김장은 1박 2일간 풀로 꽉 채워진, 숨 돌릴 틈 없는 대작전이었다. 첫 김장은 무려 300 포기 넘는 대규모 작업.
시어머니는 “대충 요 정도?”라며 양을 가늠하셨지만, 그 배추 무더기는 마치 작은 산맥처럼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산을 정복할 자, 누구인가.
첫날 아침, 시부모님이 정성으로 키운 배추와 무, 쪽파를 밭에서 수확하는 일부터 시작됐다.
소금에 절인 배추는 묵직한 고무통에 층층이 쌓였고, 무는 채칼 부대가 각자 자리 잡고 썰어냈다. 쪽파와 갓, 대파는 도마 부대의 몫. 일사불란하게 재료가 쌓여가면서, 어느새 집안은 미묘하게 알싸한 냄새로 물들기 시작했다.
둘째 날, 절여진 배추를 물에 헹궈 물기를 뺀 후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았다. 남자들이 배추를 나르기 시작하면, 여자들은 실내에서 양념을 준비한다. 마늘과 생강을 빻고, 생새우를 갈아 넣으니 집안엔 본격적인 김장의 향기가 퍼져 나갔다. 고춧가루와 젓갈, 끓여둔 풀까지 합쳐진 거대한 양념 산이 완성되자 시어머니의 구령이 떨어졌다.
자, 이제 비벼!
양념 산을 두세 명이 붙어 골고루 비비고 나면,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절인 배추에 속을 버무리기 시작한다. 제일 작은 김치통을 가져간 우리는 일찌감치 김장을 끝냈지만, 배추 산이 전부 사라지기 전까진 결코 끝난 게 아니었다. 의욕만큼 요령이 없었던 내 허리는 점점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는 김치 공장의 기계다.
배추를 다 버무려 갈 즈음, 주방에선 익은 수육을 써는 소리가 들려오고, 맛있는 냄새가 김치 향과 뒤섞였다. 시어머니께서 입에 넣어주셨던 고기 한 점. 아, 그건 김장 노동의 피로를 씻어주는 천상의 맛이었다.
김장날의 수육 한 점은 김치의 길고 매운 여정을 버티게 하는 달콤한 위로다.
그날, 나름 준비해 입은 츄리닝과 조끼는 김치 양념 범벅이 되어 버렸고, 결국 그 옷들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김장을 무사히 끝낸 대가는 꽤나 값진 것이었다.
김치, 그리고 또 김치
다 채운 김치통 4개 중 우리 집에서 소비하는 건 사실 1 통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친정엄마가 가져가신다. 남들은 친정엄마가 김장한 김치를 딸네 집에 가져다주는데, 우리 집은 그 반대다. 다행히도 시댁의 김치는 젓갈이 많지 않아 엄마의 취향에 맞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11월 말 김장 스케줄이 잡혀 있다. 어느새 김장 11년차가 되었다.
지난 주말엔 잘 익은 김치 두 쪽을 남기고, 나머지는 엄마의 김치냉장고로 보냈다. 우리 집엔 텅 빈 4개의 김치통이 다시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며느리다. 고로 김치를 버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