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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Mar 28. 2021

뱀과 미나리가 공존하는 고인물에서 미나리 뜯기에 힘쓰다

[김유경의 영화만평] 난생 처음 미나리김치를 담그게 한 영화 <미나리>

미나리가 제철이다. 봄미나리는 연하고 향도 좋다. 영화 <미나리>도 아카데미상 6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름이 널리 퍼짐은 이른바 향내다. 그 향에 끌려 초미세먼지까지 나쁨인 봄날에 상영관을 찾는다. 날 웃다 울게 한 <미나리> 맛이 끝내준다. 여럿의 출중한 연기력, 알찬 대사들과 정교한 복선이 돋보이는 시나리오, 감성을 배가시키는 음악, 세련된 상징성 등이 잘 버무려져 있다. 특히 농익은 할머니 순자(윤여정 분)와 순수한 손자 데이빗(앨런 S. 김)의 케미가 감동적 감칠맛을 자아낸다.   

   

‘시경’에 나오는 구절 “미나리를 뜯는다”는 인재 양성을 상징한다. 미나리밭이 학교와 동급인 거다. <미나리>에서 심장병을 앓던 데이빗은 미나리밭을 오가며 뛸 수 있게 된다. 할머니 순자의 “미나리 원더풀”이 엄마 모니카(한예리 분)의 보듬음과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 분)의 기강과 맞물리며 가정의 도타움을 강화한 결과다. 가정이 곧 미나리밭이 되어 데이빗을 튼실하게 키운 게다. 그 관점에서 <미나리>는 단순한 가족 예찬 영화가 아니다. 가족주의는 더더욱 아니고.    

  

미나리밭 근처에서 뱀을 쫓으려는 데이빗에게 순자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일러준다. 그 복선은 중풍으로 쓰러진 순자가 두려움으로 가리킨 곳을 정화시키려는 폴(윌 패튼 분)의 몸짓과 창고를 태운 화마로 드러난다. 자책감으로 집을 떠나려는 할머니에게 뛰어가 막아서며 손잡은 데이빗의 가정은 재난 앞에서 결속하여 무너지지 않는다. 그 지점의 윤여정 표정이 내겐 압권이다. 지쳐 부엌 바닥에서 잠든 딸네를 물기어린 충혈된 눈으로 응시하는 넋 나간 경계에서 머묾류와 떠남류의 만감이 교차한다.    

 

<미나리>는 미국에 만연한 인종차별도 스치듯 건드린다. 일상화된 스마트폰을 터치하듯. 데이빗을 향한 “넌 왜 얼굴이 납작하냐?”는 말로. 그 사회문화적 토양은 농장주로 우뚝 서려는 병아리 감별사 제이콥의 열망을 부추긴다. 화재 후 데이빗과 함께 미나리밭을 찾은 제이콥의 미나리 뜯기는 순자의 미나리 이식을 승계한 셈이다. 그건 데이빗 가족이 정체성을 추스르며 정착하는 데 이래저래 기여하리라. 그걸 암암리에 조율하는 모니카 역의 한예리 연기가 참 좋다.  

    

장바구니에 미나리를 담는다. 예전에는 다들 즐겼다는 미나리김치를 맛볼 작정으로. 김치는 갖은 양념이 잘 배합되어 숙성되어야 맛있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등 다방면에서 성과가 기대되는 <미나리>가 맛난 김치 같다. 한국말로 빚은 영상물이 설령 아카데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 해도 부끄럽지 않다. 이미 세계적 지명도가 높으니까. 지난 16일 한인 4명이 포함된 아시아계 여성 6명이 숨진 미국 애틀란타 총기 난사 사건에 놀란 한인들에게 <미나리>가 힘이 되길 바란다.  

    

가족주의나 인종차별은 타자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가 아쉽다는 공통점이 있다. 욕실에서 작은 개미 한 마리를 보고 놀라 얼떨결에 살생한 오늘 낮 내 행위도 마찬가지다. 셋 다 막연한 방어감에 치인 적대감을 내재한다. 생존에 필수적인 물이 고여 있어 뱀과 미나리가 공존하는 일상에는 적대감이 깔려 있기 쉽다. 이민자 제이콥이나 십자가를 메고 길을 걷는 폴은 누군가에게는 적대시할 대상이다. 그래서 내게는 미나리 뜯기에 주력하는 제이콥의 다부진 결단이 고인물을 정화하여 뱀도 살게 하는 공생 지향으로 보인다.     


순자와 동거하기를 꺼리던 데이빗의 순자 모심이 흐뭇한 나는 이제 난생 처음 미나리김치를 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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