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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Dec 12. 2021

왈칵 엄마가 보고 싶다

[김유경의 오늘]‘사유의 방’을 오가며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향하는 지하철에서 요양병원 원장님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연 이틀 주말의 밤 병동을 떠들썩하게 고함질렀다는. “내 얼굴이 없어졌다.”거나, “내 팔이 왜 이렇게 하야냐?”며 얼굴을 쥐어뜯고 팔을 때려 진정제를 맞혔다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어 면담 약속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내 얼굴이 없어졌다는 외침은 어떤 의미일까. 틀니 근거로 몇 아랫니만 남아 합죽해져 틀거지가 망가져 얻은 맘고생일까. 아니면, 병상에 누운 아흔 성상의 정처 없는 ‘나’와 마주한 허무의 경악일까. 어느 쪽의 심정이든 내 깜냥껏 헤아리려 애쓴다. 인지장애로 인해 언어능력을 거의 잃은 엄마와 소통할 일도 막막하다. 


‘사유의 방’은 두 반가사유상을 안치한 공간이다. 통로에 설치된 5분 남짓 영상을 감상하다보면 어둠에 익숙해진다. 심해(深海)와 운해(雲海) 등 흑백 영상의 적막들이 ‘사유의 방’ 천장에 띄운 아스라한 별빛 분위기와 자연스레 이어진다. 공전의 원근법을 빼닮은(?) 듯 아주 완만한 경사를 따라 걸으면 두 반가사유상이 차츰차츰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넓적한 얼굴의 왼편 제78호는 6세기 후반에, 갸름한 얼굴의 오른편 제83호는 7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다. 닮은 듯 다른 두 상호만큼 두 미소는 다르다. 반가사유상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부처상이 아니기에 더 그렇다. 한 발은 속세의 번민에, 다른 한 발은 수행의 선정에 걸친 찰나적 경계에서 빚어졌으니 수행자마다 미소 짓는 사유 지점이 다를 게다.



제작 시기만큼 쓰고 있는 보관(寶冠), 자태, 옷자락 무늬 대좌 등의 장식과 표현력도 차이가 있다. 360도 서서히 돌며 찬찬히 살펴보면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금속공예술에 감탄하게 된다. 메타버스에 편승해야 하는 지금 기술이 더 뛰어나다고 감히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점심 후에 한 번 더 반가사유상돌이를 하며 두 미소, ‘사유의 암호’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엄마 얼굴을 이리저리 떠올린다. 웃는 표정은 많이 보여도 은밀한 미소는 안 보인다. 가끔 나는 명상 중 얻은 미소를 명상 후 거울 속에서 발견할 때가 있다. 부지불식간에 그 미소를 달고 움직이다 엄마의 물음, “너 왜 웃고 있니?”와 마주하기도 했다. 어쩜 엄마는 그런 미소를 지닌 적이 없어 지금 아주 힘든 걸까.   


뜰에 있던 목련나무를 베었다. 오래 전부터 엄마가 원하던 일이었다. 엄마 방을 굴속처럼 어둡게 하는 장엄한 크기여서다. 꽃이 만발하면, 오가는 이들이 멈춰 사진 찍는, 그 아름다움을 사랑했기에 막걸리를 부어 주며 달래어 작별했다. 뿌리가 깊게 퍼지면서 마당과 벽에 균열을 유발하거나 집의 기운을 앗아간다는, 과학적 풍수적 이유를 맘에 품은 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엄마 자리는 어떻게도 메울 수 없지만, 뜰에는 솟대를 앉혔다. 천‧지‧인을 의미하는 세 마리 새가 가지에 조각된 통나무, ‘飛上’이다. 엄마가 말 꺼내자마자 단박 베었으면, 엄마 병증이 심해지지 않았을까. 고함치는 상황에서 엄마가 벗어나는 걸, 엄마를 안쓰러워하는 잦은 병원행에서 내가 벗어나는 걸 보듯 올려다본다.  

  

‘사유의 방’을 나선다. 나는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턱이 각진 탓인지 국보 제78호가 더 친근하다. 물론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나처럼 뚜럿한 미소가 한몫했다. 그래도 국보 제83호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는 볼수록 점입가경이다. 그러다 비로소 알아챈다. 고해를 떠다니면서도 나를 사랑하는 엄마 마음이 저 반가사유상의 미소와 닮았음을. 왈칵 엄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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