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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가 있을까?

권고사직

by crystal

회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도 회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건조한 마음으로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이 일이 워킹맘으로 살게 될 나의 험난한 일정의 아주 강한 백신이 되었던 것 같다.



출산 후 5개월 정도 지나면 무수히 빠져나가는 머리카락과 함께 달라진 외모를 마주하게 된다. 길을 잃은 머리카락과 함께 뇌세포도 함께 그 길을 따라나섰는지, 글과 말로 생각 표현하는 게 조금씩 어색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난 듬성듬성한 앞머리를 한 상태로 목이 늘어나 볼품없지만 무척이나 실용적인 수유티를 입고 말 대신 옹알이로 화답하는 아이와 종일 단방향 대화중이다. 양방향 대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원인이라 애써 믿으며 나를 다독거려 본다. 그런 일상 중에 예상치 못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팀. 장. 님.


핸드폰 진동소리에 맞춰 심장 박동도 템포를 맞췄다.

의미 없는 안부 전화일지... 의미 있는 업무 전화일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나의 염려가 행여 불편함으로 비칠까 싶어 목소리를 '솔' 음가에 맞춰 세팅하고 전화를 받았다.


"수정 책임~ 잘 지내지?"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서 어쩐지 미안함이 느껴진다.

MBTI 중 S(현실형)인 나는 이럴 때만큼은 강한 N(직관형)이 되어 불길함을 직감한다.


"아이 보느니라 힘들 텐데, 혹시 시간 괜찮으면 저녁에 좀 볼 수 있을까?"

거절하고 싶지만 거절할 수 없는 미팅 제안에 쿨하게 응한다.


"제가 퇴근 시간 맞춰서 회사 근처로 갈까요??"

직장 상사에 대한 예의를 갖춰 여쭤보았고, 팀장님이 우리 집 근처로 오시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내가 이동하면 더 미안해지는 상황. 아마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퇴근 전이고,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나는

캥거루처럼 아기띠를 하고 6개월 만에 팀장님을 대면했다.

손님 없는 커피숍, 아기 띠, 팀장님...

모든 것이 부조화스러웠다.


부조화 속 침묵을 팀장님이 먼저 깼다.

"회사 상황이 어려워 팀에서 몇 명이 다른 팀으로 전배를 가거나 소정의 위로금을 받고 퇴사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너...무... 미안하게도...."

그다음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예견하지 못한 예상되는 이야기였다.

복직 후 워킹맘이 되어 일하는 것만 생각해도 두렵고, 출산 후 감퇴한 기억력을 가지고 중단된 업무를 다시 수행하는 것만 생각해도 자신감이 바닥인데... 소속할 팀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상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이유로.. 내게 제시된 선택지는 두 개였으나 하나를 위한 포장된 선택지로 느껴졌다.


권고사직...


아기띠에 매달려 있던 아이도 엄마의 불편함을 알아차렸는지,

침착하려 애쓴 나의 목소리의 떨림을 알아차렸는지,

팀장님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없을 만큼 호탕하게 울어댔다.

그 덕에 그 힘든 대화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헤어졌다.


우는 아이를 흔들어 달래며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숱이 빈 머리칼과 수유티 대신 차려 입은 구겨진 내 셔츠가 나의 어리숙함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매일 같이 힘들어서 관두고 싶다던 회사를 드디어 그만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어여쁜 이 아이 두고 6개월 뒤 어찌 복직할까 싶었던, 수많은 시간의 고민을 멈출 기회가 왔는데...

난 이 기회 앞에서 기쁨의 환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타의로 인해 경. 단. 녀가 될 수 있다는 분노와 당혹스러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있었다.


눈물의 시간은 제법 길어졌고...

허무함과 억울함을 눈물로 다 쏟아내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리고 눈물을 멈춰야만 했다.

더 이상은 내 앞에서 생긋생긋 웃고 있는 아이 앞에서 그 아이와 반대되는 표정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니깐...' 식상하던 그 문구를 되뇌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결국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 앞에 난 퇴사를 결심했고, 회사의 마지막 배려였던 자발적 퇴사를 실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선택은 무의미했다.

육아휴직자에 대한 인사발령은 지나치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하여 내게 폭풍처럼 몰려온 그 일이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이제 난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내 마음은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 없던 일이 내겐 아주 큰일이 되어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늘 나에게 짐이 되었던 애사심을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소중한 깨달음의 시간이 되었다.

회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도 회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건조한 마음으로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이 일이 워킹맘으로 살게 될 나의 험난한 일정의 아주 강한 백신이 될 것을 다시금 직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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