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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스러움의 이유

육아 휴직 #1

by crystal

뭔가를 집중해서 못해줬다는 미안함... 난 그것을 고된 가사 노동으로 면죄하고 있나 보다.

난 결국 만삭의 손빨래를 시작으로 강박적으로 나를 갈아 넣기 시작한다.



전염병 '메르스'가 유행하던 2015년 여름.. 내가 길을 걸으면 세상 일에 관심 많은 아주머니가 다가와 "어머~ 쌍둥이 엄마네~"라고 인사하고 가셨다. 나의 배는 출산일자를 넘긴 것 마냥 과하게 커서 애 둘은 있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보는 이들도 나도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커다란 배를 끌어안고 오래 앉아 일하기 버겁고 메르스도 걱정되어 겸사겸사 임신 38주에 휴직에 들어갔다. 복직 일자를 최대한 늦추려고 애 낳는 날까지 출근하고 싶었던 희망사항은 희망으로 남겨두고....


사실 출산의 두려움보다.. 아이를 만날 설렘보다.. 내게는 직장 생활 8년 만에 찾아온 첫 휴식에 대한 기쁨이 더 컸다. 그땐 몰랐다. 그 순간이 내 삶의 변곡점이 되리라는 걸...

'뱃속에 있을 때가 좋을 때라'라는 인생 선배들의 말을 '잊었으니 그리 말하는 거죠. 지금 제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라고 받아치고 싶었던 때라... 나 또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그 말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만삭 임산부는 그동안 밀린 (정확히는 제대로 해보지 못한) 태교와 아이 만날 준비를 속성으로 했다. 여유롭게 일어나 클래식 음악을 틀어두고 아이 옷과 수건을 정성스레 삶고 손빨래했다. 배가 남산만 해서 쭈그려 앉기도 힘들었는데, 그 상태로 빨래를 어찌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미련스럽다. 하지만 그땐 그리해야 아이에게 뭔가를 해준 것 같은 기분에 그것으로서 미안함이 씻겨지는 것 같아 흐뭇했다. 그놈의 못된 완벽하지 않은 완벽주의를 또 소환하여 집을 무균실 만들 요량으로 구석구석 먼지를 깡그리 잡아 냈다. 만삭 임산부라기보다는 열정 가득한 청소 업체 직원과 같았다.


뭔가를 집중해서 못해줬다는 미안함... 난 그것을 고된 가사 노동으로 면죄하고 있나 보다.

난 결국 만삭의 손빨래를 시작으로 강박적으로 나를 갈아 넣기 시작한다.




아이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고, 과거 복강경(腹腔鏡) 수술 이력이 있어서 병원에서는 제왕절개를 권했다. 하지만 내가 본 육아서에서 자연분만으로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마치 태어나며 꼭 필요한 중요한 것을 처음부터 상실해 가는 것처럼 묘사했기에 난 꼭 자연분만을 성공해야만 했다. 주치의도 포기했는지 자연분만을 하려면 수술했던 대학병원에 찾아가서 자연분만 해도 이상 없다는 소견서를 받아오라고 했고, 왕복 두 시간 되는 그 병원을 찾아가 소견서도 준비해 뒀다. 늘 사전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부족했다.

18시간 진통 끝에 결국 아이 심박수가 떨어져 응급 수술을 하게 되었고 난 그렇게 1초 간격의 마지막 진통을 마취제를 통해 잠재우며 선물 같은 끝을 느꼈다.


다음은 관문은 모유수유였다. 육아서를 통해 모유는 만병 통치약처럼 학습되었기에, 출산 준비물에 젖병 대신 유축기를 넣었다. 강한 의지였다. 하지만 나의 모유양은 주식이 아닌 간식에 불과했고 중간에 아이가 모유로 인한 황달 증상이 나와 하루 이틀 모유 수유를 중단하며 젖몸살이라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고통을 마주해야 했다. 여자가 아닌, 아니 사람이 아닌 소가 된 듯한 기분을 때때로 맛보았다.


하지만 출산과 다르게 이것은 나의 인내와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부분이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달라서 노력으로 안 되는 모유수유도 있겠지만.. 내 경우는 극복 가능한 경우였다.) 절대 빈곤한 모유양을 늘리겠다고 100일까지 매일 직수와 유축, 분유 혼합을 지독하게 병행했다. 수유 시간을 어플에 기록했는데 매일 9~10시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내 고개는 왼쪽으로 기울어졌고, 의자에 앉으면 자연스레 까치발이 되었다. 수술 자국은 쑤시고 비대칭 수유 자세로 인해 이곳저곳 추가로 더 쑤셔댔지만 100일 즈음부터 간식이던 모유가 아이의 주식으로 바뀌어가며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단군신화의 100일처럼 상징적인 그날의 인내로 결국 완모에 성공했다.


하지만 복직을 앞두고 단유를 가장 먼저 준비해야 했다. 워킹맘 예행연습으로 가장 소중한 것부터 포기해야 하는 것 같았다. 끊어진 탯줄을 젖줄로 이어간다고 말도 안 되는 감성을 뿜어내던 나는 단유를 무척 애달퍼했다.


민망하게도.. 그 아쉬움은 하루 저녁을 못 넘겼다. 2년 만에 맛본 맥주 한잔과 초밥이 아쉬움을 슬며시 밀어내고 사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2년만에 맛본 연어 초밥과 맥주~


100일의 기적은 모유에서만 나타나고 아이는 여전히 한 시간 간격으로 깨서 울어댔다. 아이를 밤새 달래고 등센서 때문에 낮잠도 아기띠에서 재우는 절대 수면 부족 상황에서도 영양소 파괴가 최소화된다는 맘카페 추천 식도로 온갖 야채를 잘게 다져 이유식을 만들었다. 야채 다지기와 이유식 메이커를 무시한 채 정성 한 스푼 넣어 다지고 저어가며 끓인 이유식을 만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아이를 업고 만든 이유식


하루 수면 시간은 고3 때보다 못한 서너 시간인데 그 시간을 쪼개 아이 성장 동영상을 만들고 육아서를 읽으며 좋은 엄마가 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아이가 6개월 즈음되어 문화센터에 갔을 때 모유수유 하는 엄마도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는 엄마도 수유 때문에 원피스 대신 앞섬이 열리는 매일 똑같은 셔츠만 입는 엄마도 많지 않음을 자각했다.


나의 유난을 자각했다.


하지만 달라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온전히 하루를 같이 할 수 있을 때 더 집중하고 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내 방식의 사랑이었다.


어쩌면 유난스러운 정성을 한 알씩 쌓아 담아 저장해 두고 출근으로 미안함이 쌓인 어느 날 그것을 꺼내어 사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유난의 기억을 소환해 내 마음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리고 정말 그것은 내가 출퇴근으로 무너지는 순간 든든한 적립금 통장이 되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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