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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덧하는 회사원

입덧

by crystal

바로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워킹맘으로서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낀 순간...

"일하는" 임산부여서 아이에게 뭔가를 못해주고 있는 것 같은 미안함을 적립해 간다.



입덧은 건강한 아이가 보내는 신호라더니 나의 아이는 임신 5주 차부터 안부인사를 강하게 보내기 시작했다.

음식 냄새 맡는 것도 괴로운데 사회생활의 점심시간은 더 쉽지 않았다. 임산부라고 매번 메뉴 선정을 배려받기 염치없었다. 혼자 안 먹고 있으면 주변에서 신경 써 주시니 그 마음이 불편해서 꾸역꾸역 맨밥이라도 조금씩 넘겨보았다.

회의 도중 토할 것 같아서 화장실로 뛰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화장실 변기통을 부여잡고 토하는 일이 잦아졌다.

작고 조용한 그 공간에서 눈물과 함께 그것들을 쏟아 내고 나오면 민망함과 서러움이 뒤늦게 찾아오곤 했다. 그때 그 적막을 깨고 청소 용품이 가득한 창고에서 누군가 슬며시 나와 내게 위로를 선물한다.


"힘들죠?
나도 입덧을 심하게 했어서 옛날 생각나네.
쉬어야 하는데 일하면서 입덧하면 얼마나 힘들어..."

청소하시는 여사님의 따뜻한 말은 혼자인 그 공간에서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 준다.

신체의 고됨이 마음의 위로로 싹 씻겨지는 것 같다.


나는 입덧하는 임산부 직장인이다.

때문에 나의 입덧이 업무에 방해가 되거나 동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괜찮은 척하는 것은 참 어려웠다.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상태로 고된 업무를 마음까지 써가며 애쓰고 나면 집에 가는 퇴근길은 더 지쳤다. 남편이 일찍 끝나면 차로 데리러 왔는데, 그나마 남편 차를 타면 중간에 차를 세워 토하고 갈 수 있어 감사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각종 냄새와 퇴근길 숨 막히게 꽉 끼는 밀집도 때문에 한 시간 거리를 걸어갈 때도 있었다.


워킹맘 예고편 같은 이런 상황들은 나에게 첫 번째 퇴사 위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난 아직 내가 꿈꾼 '멋진 엄마의 일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없었기에,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임신의 여정은 40주라는 d-day가 정해진 인내의 과정이었고, 내게는 너무나도 감사하게 출산과 육아 휴직으로 직장 생활의 첫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출구를 앞두고 포기한다는 게 어리숙해 보였다. 그래서 버팀을 선택했고, 그때의 버팀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카운트 다운을 하다 보니, 5주 차에 시작한 나의 입덧은 32주가 되어서야 잠잠해졌다.





입덧이 끝나고 나니 크게 부풀러 있는 배가 눈에 들어왔다.

몸이 무거워지니 걷는 것도 힘들고 특히 만원 버스에 배불뚝이 임산부가 끼여 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뱃속에 있는 내 아이의 공간도, 주변에 서 있는 저 아가씨의 공간도 좁아질까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한 번은 버스에서 고성이 오가는 일도 있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께서 곧 출산할 것 같은 내 배를 보고 자리를 양보해 주셨는데, 그 틈을 밀치고 다른 아주머니가 앉아버렸다. 자리를 양보해 주신 할머니는

임산부가 너무 힘들어 보여 일부러 양보해 줬는데, 그걸 뺏어 앉냐?

라며 소리치셨고, 나는 가시방석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끙끙거렸다.(상황은 불편했으나, 그래도 할머니의 배려가 너무 감사했다.)


사무실 의자에 8시간 앉아 있으면 나의 다리는 코끼리처럼 부어 퇴근 무렵이 되면 신발이 꽉 끼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치수 큰 신발을 신고 출근해야 했다.


가끔 일에 집중하다 보면 뱃속 아이가 존재를 알리듯 배가 심하게 뭉치거나 입덧이 심해져 조퇴하고 링거를 맞기도 했다.


바로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워킹맘으로서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낀 순간...

누구보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고, 여느 엄마와 다르지 않게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이가 최우선이지만 내게 부족해 보이는 엄마 자격.

태교 음악 대신 시끌벅적한 업무 토론을 들려주고

좋은 그림 대신 골치 아픈 보고서를 보고

임산부 요가 대신 출퇴근을 위한 걷기 운동만 하는 나는

"일하는" 임산부여서 아이에게 뭔가를 못해주고 있는 것 같은 미안함을 적립해 간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는데

아직 입장하지 않은 엄마의 문 앞에서 좋은 엄마를 떠나 그냥 엄마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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