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거울 속 드문드문 비친 내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워킹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출근하던 첫날, 난 환상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생존형 워킹맘이 되었다.
15개월 출산 및 육아 휴직의 결말은 복직이었다.
그즈음 아이는 돌발진으로 예상되는 고열로 3일 동안 40도를 넘나들었다. 난 이게 "엄마 나 두고 출근하지 마~"라는 신호로 느껴졌다. 아직도 밤에 서너 번씩 깨서 우는 바람에 안고 달래 재워야 했기에 원 없이 자고 싶다는 바람도 여전히 유효했다.
복직!!
일상은 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울음을 삼켰고, 누군가는 어린아이가 가엽다며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누가 울면 따라오는 습성 때문에 나 역시 눈물 흐를 뻔했으나 지금 울면 회사 다니는 내내 눈물마를 날이 없을 것임을 직감했는지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천장을 보며 밀어 넣었다.
이왕 출근 결심을 했으니 이제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
감정이 늘 앞서던 내가 이때만큼은 꽤나 이성적으로 느껴져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다.
복직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나 대신 엄마 역할을 해줄 양육자를 찾는 일이었다.
복직을 위해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
아이를 안전하게 믿고 맡길 수 있으며, 덤으로 집안일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는 내가 가장 편한 사람
친. 정. 엄. 마
애석하게도 나의 구세주는 우리 집에서 300km 넘게 떨어진 곳에 살고 계셨다. 엄마 찬스를 쓰기에는 서로 같이 사는 방법뿐이었다. 이기적인 딸은 부모님의 고생보다 스무 살 이후 같이 살아본 적 없는 엄마랑 한집에 살며 불편할 것들만 염려하며 결단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맙게도 남편이 그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장인 장모님이 올라와서 손주 봐주시는 건 무조건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야."
이기적인 내 마음이 자각되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까지 7개월의 도움이 필요했고 결국 부모님과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내가 아쉬운 입장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살았다. 언제나 당당한 태도였다.
남들에게는 늘 기본 값인 친절과 배려 그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엄마를 대했다.
엄마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애정 표정 없는 내게 서운해하셨고,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엄마의 양육 방식이 불편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라서 쉽게 불평불만을 쏟아 냈고, 본인 터전을 자주 오가지 못한 채 낯선 도시 속 딸 집에 갇혀 육아와 가사 노동을 쉼 없이 해야 하는 엄마 또한 점점 지쳐 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땐 정말 고마움보다 짜증이 넘쳤다. 회사일로 시달리고 돌아온 상태에서 지쳐 있는 엄마의 표정과 말투를 대하는 것이 불편했다. 틀지 말라는 TV를 자꾸 틀어주는 아빠게에 화가 났고, 내 주방과 냉장고가 엄마스타일로 바뀌어 가는 게 싫었다. 대충 먹자 해도 크게 먹게 상을 차리고, 빨래는 내가 한다고 해도 다 해두는 엄마가 답답했다.
무척 이기적이었고 몹시 배 부른 소리였다.
엄마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죄책감으로 확대시켜 다시 엄마에게 짜증으로 되갚았고, 엄마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부모라면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며 차단했다.
오늘 회사에서 수없이 내뱉은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부모님께는 인색하게 침묵했다.
엄마와 가장 격렬하게 싸운 시간이었고, 7개월 후 부모님이 감당했던 일을 오롯이 우리 부부 둘이 겪어가며 매일 소리 없이 감사함을 말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내려가시고 나니 비로소 워킹맘의 실전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 전속력으로 달려 집에 데려와 딱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정신줄로 부여잡고 밥상을 차릴 때, 과하게 차려져 있던 그 엄마 밥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우여곡절 많았던 부모님 찬스가 종료되고, 20개월 된 아이와 함께 사회로 나섰다.
"세 돌까지는 엄마가 키워야 정서적으로 문제가 없다는데..." 워킹맘에게 뼈 아픈 말이다.
실천하고 싶지만 절대 실천할 수 없는 말. 실천을 위해서는 퇴사만이 답인 상황.
육아는 양보다 질!!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새기면서도 나는 그놈의 세돌이 신경 쓰였나 보다. 궁여지책으로 아이를 나와 가까이 두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가겠다는 생각으로 직장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기로 했다.
종일 같이하지는 못해도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하겠다는 욕심.
비슷한 시간 패턴일 테니 이른 등원과 늦은 하원이 아이에게 덜 미안할 공간.
사실 회사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선배들을 보며 결혼식에 대한 로망을 가진 아가씨처럼 나름의 로망도 있었다. 뾰족구두를 신고 잘 갖춰진 커리어 우먼의 모습으로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함께 출근하는 그림. 출산을 했으나 아줌마가 되지 않고 이 시대의 멋진 엄마로 살아가는 아줌마 타이틀이 어색한 신책임!!
하지만 그 로망은 첫날부터 와장창 깨졌다.
첫날의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초보 엄마가 복직을 하며 넘어야 할 첫 관문은 초보운전 딱지였다. 기질 검사(TCI) 불안 수치가 상위 1%로 높은 내게 운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성격은 쉬이 변화해도 기질은 타고나는 거라는데, 그 기질을 가볍게 못 본 척하고 난 운전대를 잡았다. 복잡하기로 소문난 영등포 로터리를 뒤에 탄 아이가 놀랄까 봐 '악' 소리 한번 크게 못 내고 삼켜가며 아이를 태우고 회사로 향했다.
아침부터 자는 아이 깨워 밥 차려 먹이고 시간에 쫓겨 안고 뛰면서 이미 하루 체력의 절반을 쓴 것 같은데 운전하며 긴장하고 출근하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었다. 엄마의 긴장감이 아이에게 전달된다는 육아서의 구절이 떠올라, 긴장감을 콧노래로 포장하여 흥얼거리고 아이의 등원과 엄마의 출근 task를 무사히 해냈다. 이만하면 성공적인 출근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한 바람에 어린이집 대신 아이 기분을 맞춰줄 편의점으로 향했다. 업무에 지쳐 달달구리 한 음식을 사러 가끔 들리는 편의점을 아이 손을 잡고 오니 기분이 참 묘했다. 내 공간에 아이를 초대한 것 같아 설레었다. 엄마의 세세한 감정선과 별개로 아이는 먹을 것에 집중하더니 흰 우유를 집어 들었다. 아침밥 든든히 먹고 나온 상태라 빈속이 아니니 우유는 괜찮겠지 싶어서 허락했다. 편의점 옆 의자에 앉아 아이는 우유를 먹고 난 오늘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오늘의 뿌듯함을... 그때였다.
우유를 마시던 아이가 분수토를 했다. 토하면서 본인도 놀라는 아이의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하지만 안쓰러움보다 내게는 수습이 먼저였다. 우유토는 냄새도 심한데 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복직 기념으로 구매한 아이보리색 재킷이 하얀색으로 물들여졌다. 그 하얀 재킷을 까만 비닐봉지에 쑤셔 담고서 놀란 아이를 어르고 달래 등원 시켰다.
그리고서 회사 귀퉁이 후미진 화장실에서 재킷을 대충 헹궈내며 환상도 흘려보냈다.
화장실 거울 속 드문드문 비친 내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워킹맘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출근하던 첫날, 난 환상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생존형 워킹맘이 되었다.
강렬했던 그날을 시작으로 하루살이가 되었다.
크고 작은 변수들이 무작위로 쏟아져 내려왔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