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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May 23. 2016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는 결심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시간이 많았던 나는 TV 볼 시간이 언제나 흘러넘쳤고, 시간이 없을 때도 시간을 만들어 TV 보는 것을 즐겼다. TV를 통해 전해 들은 가십거리들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유연하게도 해주기도 하고 몇몇 정보들은 유용하게 실생활에 활용되기도 했다.


그래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연예인들의 근황이나 견해들을 소소하게 전해 들을 수 있는 '토크쇼'라 인기가 많은 프로는 되도록 챙겨 보았다. 어느 프로에선가 가수 김건모가 출연해 친누나에게는 남자를 볼 때 싫어하는 점이 11가지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자기 매형이 그 모두를 갖고 있다고 말해 사람들을 웃게 했다.  


싫어하는 점이 11가지나 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그 모두를 가진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참으로 운이 없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이상형이 무어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하고 언제나 그저 착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곤 김건모 씨의 누나를 떠올렸다. 싫어하는 점만 피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나이가 들고 스스로의 취향을 좀 알게 되면서 나는 듬직하고 순한 사람이 좋다는 막연한 생각은 했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딱히 좋은 스타일이 있진 않아도 반대로 피하고 싶은 점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바로 마르고 얼굴이 작은 사람이었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를 일이라고 했던가. 내 아이의 아빠로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은 많이 마르고 얼굴이 작은 편이어서 가끔은 내 스스로 취향 자체가 있긴 했던 건가, 처음부터 나에 대해 제대로 알긴 했던 건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아빠를 아이는 그대로 빼다 박았다. 피하고 싶었던 것을 피하지도 못했지만 둥실둥실한 우량아 아들로 키우고 싶던 바람도 함께 날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하지 못한 그 점을 두고두고 신경 쓰며 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남편에게서 다른 무엇보다 '내 아이의 아빠'라는 부분을 크게 봤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만남 속에서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를 확신이 섰다. 그런 사람에게서 외형적인 모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누나 분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쉽게 그려지지 않던 '내 노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한참 뒤의 우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만나 소박하고 담백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가진 게 많지 않고 부족한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분이 들었고 그렇게 결혼을 결심하는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혼자 살거라 생각했던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지난 4년간 예상처럼 평온한 것만은 아니었다. 굳이 찾지 않아도 싸울 일이 천지에 널렸다. 게다가 좋은 아빠라는 기준에는 '남편이 생각한 정도'와 '내 기대'에 차이가 있어 어긋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남편은 자기가 그렇게 아빠로서 부족할 줄 몰랐고 나는 내가 엄마로서 꽤 잘 해낼 줄을 몰랐다. 그 말인즉슨 나는 남편에 대한 기대가 높았고, 남편은 내게 전혀 기대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아이와 둘이 처음으로 한 방에서 잠이 들었던 날이었다. 엥-하는 울음소리에 눈이 번쩍 뜨여 바로 몸을 일으켜 아이를 안아주고 우유를 탔다. 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 하나에 남편은 물론 심지어 친정엄마까지 놀랐다.


남편은 내가 안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엄마는 내가 못 일어날 거라 확신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게 고백을 했다. 그런 낮은 기대 속에서 육아를 하다 보니 주변 시선은 멀 해도 대단하다는 반응뿐이었다.


별 거 아닌 걸 가지고 왜 이렇게 난리들인가 싶으면서 기고만장한 마음이 하늘로 치솟아 아이 씻기는 걸 도와주고 품에 안아 재워주는 남편에게 왜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재우지 못하는지에 대한 불평을 토로했다.


남편도 아빠가 처음이었고 나도 엄마가 처음이었다. 둘 다 잘하고 싶었고 둘 다 많이 부족하기만 했으며, 둘 다 잘한다 싶을 때도 있었고 둘 다 좌절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반응은 같지가 않았고 나는 늘 만족하지 못했다.


어느 글에선가 남편들이 운전, 설거지, 분리수거, 아이 목욕, 청소만 해줘도 만족할 수준이란 댓글을 보며 공감도 되고 살짝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엄마들이 하는 일은 백가지가 넘는데 저 정도 수준으로 만족해야 한다니 너무 슬픈 일 아닌가.


실제로 주변에는 내가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외출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지인들이 차고 넘쳤다. 외출만이 아니라 문화생활을 향유하거나 장시간 야근이라도 할라치면 맡기는 나, 맡은 남편 모두를 신기해했다.


나는 정말 만족해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이 피어오르던 무렵 '서로 가여워하는 마음으로 산다.' TV에서 들은 한마디가 또 생각났다. 배우 이선균의 와이프이자 역시 배우이기도 한 전혜진이 '토크쇼'에서 한 말이었다. 문득 마음이 아련해졌다. 나도 그렇게 살자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가여워해 주기는커녕 멀쩡한 남편을 가엾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화를 내는 내게 언젠가 남편은 당신이 완벽하기 때문에 당신을 칭찬해주고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아이의 엄마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넘어가는 거라고 말했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담담히 전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적당한 대답 거리를 찾지 못했다.


나는 남편의 무척 잘하고 있는 점도 그 정도는 당연한 거라고 늘 그렇게 여겼다. 인정해주지 않고 보듬어주지 않았다. 내 힘든 점만 나열하고 나만 힘들다고 못 견뎌했다.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말을 책임지라고 나는 무언으로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키우고 살면서 연예인이 지나가듯 던지고 별스럽지 않게 들었던 두 마디가 그렇게도 기억이 나고 힘이 되는 것처럼 어쩌면 인생은 별 것 아닌 일로 심각해지기도 하고 간단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생각이 많다는 건 너무 힘들거나 너무 여유가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처음 결혼 결심을 하던 때처럼, 그리고 살면서 지키고자 했던 마음처럼 단순하게 살면 그만이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어른들이 말하는 좋은 날이라는 게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고백하건대 '끝을 그려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마음 편하고 안심이 되는 여정이다. 미운 마음이 들고 지치는 날이면 내게 확신을 주었던 그 날을 더듬으며 다시 그 길을 나설 채비를 해본다.



*노트북 감사에 대한 글이라고 하면 너무 속 보일까요?

  나도 모르게 첫 글로 이 내용을 쓰고 싶었습니다.

  좋은 글 써볼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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