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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n 30. 2016

울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엄마라서더기억에남는영화(1)

고백(2010) 2015년 2월 기록


아주 가끔 뭔가에 이끌려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 읽거나 봤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의도적으로 두세 번 볼 때도 있지만 이번 경우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진짜 처음인 줄 알고 다시 보게 된 경우였다. 그럴 때면 내 건망증에 한 번 놀라고 일관성 있는 취향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이 영화, 고백은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학원물이자 스릴러이다. 13세 아이들의 발육을 위해 학교에서는 우유를 배급하고 모두 마셨는지 체크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우유 각을 보는 순간 내가 이 영화를 본 것 같은데 아닌가? 맞나?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여주인공의 내레이션 같은 독백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고백에 이끌려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영화를 진행시켰다.

      

“이 반에 내 아이를 죽인 범인이 있습니다.”


살의가 있었으나 실제로 죽이지는 못한 A, 살의는 없었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된 B. 누구에게 더 큰 잘못이 있는 걸까. 그들에게 내려진 소년법상 보호관찰 처분은 사실상 무죄다. 이 상황에서 죽은 아이의 부모는 누구 탓을 해야 한단 말인가. 교사와 부모가 무언가 말을 걸면 맘속으로는 반대로 대답하는 그들이 가진 거리와 차이에서 우리가 만들어내고 키워가는 마음속 악마를 발견한다.   

   

“생명의 무거움을 실감하고 죄를 지은 걸 반성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유코는 중학교 교사이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 수영장에서 익사사고로 딸을 잃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이 사건은 사고가 아닌 살인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선생은 13살 미만 아이의 죄를 보호하는 현행법에 호소하는 대신 어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 즉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견디기 힘든 ‘공포심’을 심어주고 떠난다. 강한 인상을 남긴 고백에 이어 등장인물들의 또 다른 고백이 이어지며 영화는 계속된다.  

    


아이들에겐 그들만의 리그가, 그들만의 룰이 있다. 단순한 사실도 대단한 신앙처럼 받들어지고 중요한 가치도 쉽게 무시된다. 제재하고 재단하는 것보다는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내 부모가 나를 감싸고 도는 것보다도 제대로 된 진실을 들여다보고 사실로 자신을 평가해주길 바랄 때도 있다. 설령 지금 당장은 쓴소리라도 아이들은 아는 것이다. 그게 자신을 위한 선택인지 어른 스스로를 위한 변명인지 말이다.


이 영화에서 문제제기는 아이들의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다각도로 진행된다. 똑똑하기만 하고 따뜻하지 못한 엄마가 빚어낸 비극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자신의 삶이 너무 중요한 사람, 현실에 발붙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멀리멀리 날아갈 공상만 하는 사람들은 부모가 되는 것을 유보해야 할 것이다. A와 B의 변명에 현혹되어 모든 걸 한 가지 원인으로 몰아갈 수는 없지만 삐뚤어진 엄마의 행동에 분명 사건 발달의 시작점이 있었다.

     


칭찬받고 싶었던 아이와 인정받고 싶었던 아이의 엇나간 선택이 가져온 비극이, 생명경시가 낳은 비극이란 소재에 다가가기 위한 장치로서의 살인은 사실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몰입감을 높이는 내러티브(서술), 광고를 보는 듯한 독특한 연출과 영화 촬영 방식, 그리고  화면 구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처음 영화를 보았던 그때는 아이가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짧은 과거 회상에도 죽은 아이가 다시 나오는 부분은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다. 여주인공의 조근조근한 말투와 무표정한 연기가 인상적이다. 아이들도 꽤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아이 생각에 오열하는 그녀의 처연한 옆모습이 엄마라서 그런지. 무척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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