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정신병력을 모두 가질뻔한 자의 이야기
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양극단의 감정을 오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일정한 일을 수행하는 게 힘들 수도 있다. 그리고 급성기, 중증기에는 당연히 쉬면서 치료에만 전념해야 하기도 하다. 감기가 심해져 폐렴에 걸리면 입원까지 해야 할 수도 있듯 정신 질환도 똑같다. 조울증도 경미할 때는 약만 꾸준히 먹어도 정상인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감기에 걸렸다고 일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상이라 증상이 심하지 않은 한 일반인들은 그 정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다를 뿐.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태 해온 전공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는 여전히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나의 정신적인 병력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다 떨쳐낸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당시에도 당연히 답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일단 먹고살아야지! 가 우선이 됐던 것 같다. 그 생각만 했을 때는 오히려 단순해서 그런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는 것일까? 에 대한 것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치료를 꾸준히 받아서 원래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나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준비를 계속하고 있어야 기회가 왔을 때 나를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가짐이 중요한 법이다.
전공을 버린 나는 공공기관, 공기업, 사무직 등만 찾기 시작했다. 알바몬, 사람인을 매일매일 뒤적거렸다. 사무직은 아프면서도 땄던 컴퓨터 활용능력이라는 자격증을 활용할 수 있었고, 크게 보면 사무직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사람으로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컸다.
그리고 두어 군데 공기업과 연구원에서 사무원 업무를 했다. 사내 대학 운영 업무를 맡기도 했고, 비서 업무와 간단한 회계, 총무 업무 등을 하기도 했다. 이때는 계약기간이 한 달, 세 달로 정해져 있어서 긴 시간 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서 일했던 경험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자의로 그만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20대의 사회생활을 정리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과 안정된 환경, 주어진 업무를 하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커피만 타도 행복하고 힐링이 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런가?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집중했더니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마지막 세 달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는 공공기관에서 정년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후로 나는 5년, 이제 6년 차 공공기관에서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단순히 일만 한 것이 아니다. 내일 배움 카드로 전산회계 자격증을 4개나 취득하기도 하고, 오래된 자격증들(한국사 2급, 토익 800점)도 갱신하기도 했다. 오래된 자격증들은 조울증이 발병하기 전에 땄던 것들인데 굳이 업그레이드한 것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정신질환을 앓으면서 정말 바보가 됐다는 생각, 셈에 너무 느려졌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까딱 잘못하면 사람들한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점을 말이다.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회계 자격증을 딸 때는 이것도 못하면 나는 이제 진짜 스스로를 '바보로 생각할 것 같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라고 생각하고 매달리긴 했다. 나의 자격지심과 열등감이었지만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 동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격증을 한 번에 따냈을 때의 그 쾌감이란!
회계 전공을 하지도 않았고, 처음 해보는 공부였으며, 셈이고 뭐고 지능도 낮게 나올 정도로 인지능력 또한 떨어졌던 사람이지만 해낼 수 있었다. 약 잘 챙겨 먹고, 좋은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꾸준히 살아내다 보면 그에 응하듯 세상은 꾸준히 기회를 가져다준다. 그러니 오늘 나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끌어내릴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거기서 무너지지만 말자. 그리고 넘어지더라도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만큼은 하지 말자. 조금 쉬다 일어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