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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지니 May 04. 2023

변화는 예고 없이 온다

두더지 게임


 몸을 가눌 수 없이, 정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순간까지 갔을 때 나에게 남은 최선의 인간관계는 ‘가족’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증’의 관계를 지속해왔던 엄마는 나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문제의 일이 있고 난 다음 날, 포항에서 대전까지 첫차를 타고 올라왔다. 그날은,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독립할 수 있는 집을 얻게 될 기회가 생기는 날이었다. 집을 계약하는 날이었는데, 이미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서 포항에서 쉬고 올라와서 일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포항에서도 정신없이 계속 잠만 자고 간단한 일도 헤매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빠는 달라진 나의 상태를 계속해서 확인했고, 대전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보고는 잘 처리하고 들어가겠지 했던 것 같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발생했다. 대전에 올라와서는 계약금을 넣고 관련 서류를 제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도 대전을 반나절 내내 헤맸다. 치매 걸린 실험 쥐가 된 기분이었다. 같은 자리를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그 상황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가게의 간판들에 일련의 메시지가 있다는 생각을 했고, 마치 게임에 들어가 있어서 현실에서 벗어난 것 같은 그 기시감, 그 기분을 만끽했다. 나는 정신을 놓을 만큼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가? 계약 관련자들을 맞닥뜨렸을 때, 악마처럼 보이거나 내 눈을 고개를 틀어가며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환각에도 시달렸다. 모두가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닌데, 그런 몇몇 사람들은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계약 업무 시간이 끝났음에도 구석에 앉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이상하게 느꼈던 당시 책임자는 출입구까지 데려다 주며 내일 와서 다시 해도 된다며 집으로 보냈다. 그때야 은행을 가야 하루 최대 이체 금액 한도를 풀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됐던 듯하다. ATM기와 계약 장소만 6시간 동안 빙글 빙글 돈 것이다. 택시를 타고 이미 문을 닫은 은행 앞에 가서야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사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순간 아빠의 다급한 목소리가 잠시 정신을 돌아오게 했다. ‘OO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택시 타고 최대한 빨리 집에 가’ 그리고 다음 날은 일어나서부터 환각과 환청과 망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움직이는 게 힘들어질 정도가 됐다. 계약은 본인이 직접 해야 하지만, 내가 이미 혼자서 수행할 수 없는 상태임을 확인해버렸기 때문에 엄마가 첫차를 타고 포항에서 올라왔다. 기력이 쇠해서 그랬다고 판단한 엄마는 일을 마무리 짓자마자 수액을 맞게 했고, 그마저도 나에게 의사가 독극물이나 특정 약물을 주입해서 특별해진 나의 정신을 흐리게 하려는 수작을 건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기절했다가 다 맞지 못하고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바늘이 꽂힌 팔을 잡아 뜯어야 하나 했던 기억이 난다.      





 이날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이유는,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기 위해서다. 어느 날보다 맑은 아침,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1%도 예상하지 못하고 방심한 그 순간, 교통사고로 차에 치인 것 같은 일이 나에게도 발생한 것이다. 사실 이 날 나는 이미 죽었다. 큰일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끝나서 정말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도 이 날을 생각하면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의 시작이었고,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가 생긴 날이기도 했기에 반드시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 일 아닌 일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조울증’이라는 병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꿔 놓은 변화이다.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말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어디에 있을까부터 인지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변화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고, 더 나은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도 꽤 명확하다. 이번 글은 사실 처음에 제목부터 정했었다. ‘변화는 예고 없이 온다’였다. 처음에 나는 이 제목의 의미를 두고 지금 얼마나 좋아졌는지, 무엇을 해서 좋아지게 됐는지를 증명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가? 글이 하나도 써지질 않았다. 나는 여전히 작은 일에도 무너져서 힘들 때가 많고, 약도 다시 먹게 되는 상황까지 왔기 때문이다. 근데 ‘나, 이만큼이나 좋아졌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내 상태를 인정하기도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최근의 증상은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몸이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혹사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가 되면 기절했다가 다시 일어나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나날을 보냈다. 업무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부주의하고 잊어서 지적받기 일쑤였고, 일상생활도 다시 문제가 생겼다. 친구들과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생각에 잠겨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방금 했던 얘기도 놓쳐서 속상하게 했다. 성인 ADHD인가도 친구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주치의 선생님에게 얘기했는데, 단칼에 아니라고 하셨다. 생각이 많은 것뿐이니 이런 부분은 약을 먹으면 바로 개선된다는 진단을 해주셨다.

     

 하지만 쉴 시간 자체를 두지 않고, 많은 생각을 회피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일정은 조증임을 다시금 확신하게 하는 단서가 돼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최근 즐겁게 시작한 오일파스텔로 그린 그림을 자랑하듯 보여 드렸을 때도 오히려 더 심각해진 선생님을 발견해서 좌절했다. 색채가 너무 알록달록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조증이라는 생각을 더 확고히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내가 약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아무리 전문의고 나만의 주치의 선생님이라고 해도 그들의 판단에 ‘나는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어. 망했어. 끝이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말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황들에 조금은 지쳤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을까? 그 모습들이 과연 내 모습이었던가? 사실 그림만 보고 내 상태를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선생님과 얘기하면서 나 스스로 인지했던 증상들에 대한 언급과 근황 얘기로 판단하셨을 터.      


 최근에 이런 감정들을 겪으면서 나는 정말 예민하고, 작은 것에도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정했다. 패배감이 들어서 내가 이뤄낸 것들에 대해서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게 조증의 증상이라고 해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했다. 이런 점이 조울증의 장점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붕 떠있더라도 새로운 일에 관심을 두고 해내고, 성취감을 느끼는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떠있는 감정이 높을수록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안다. 그런 상황은 혼자 있는 집에 들어서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서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을 더욱 많이 늘렸다. 체력이 좋지 않아서 더 다행이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빨리 방전되니까. 집 앞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면 긴장이 풀려서 차 안에서 기절하고 자는 시간도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좁은 공간에 몸을 뉘이면 안전하고 편안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 복잡한 세상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그런 점에서 열선을 튼 따뜻한 차 안이나 작은 다락방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감정을 가두기 위해,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했던 일들이 꽤 많았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무기력해지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짧은 직장 생활 중에서 가장 긴 경력이 된 비서 일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그 시작으로 가보자. 코로나가 막 시작된 20년 초, 난생처음 ‘비서’라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 당시 코로나 때문에 한 달 정도 채용공고가 미뤄져서 아무래도 직장을 구하기 적절한 시점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나 외에도 직장을 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비서 일임에도 당시 면접에서만 100명의 지원자가 왔다. 이런저런 면접은 봤다고 생각했는데 11명이 들어와서 1시간 가까이 본 면접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백여 명 중에 남자 1명, 여자 1명만이 합격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사실 편견이지만 여비서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날씬하고 예쁘고 단정한 승무원 같은 이미지. 하지만 나는 조울증 후유증으로 살도 20kg 가까이 찐 상태였고, 예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경험만 해보자 싶은 마음으로 임했었다. 면접위원들도 운으로 되는 자리니 떨어져도 실망하지 말라는 말로 시작했을 정도였다. 힘들 것이라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을 눈으로 직접 봤을 때는 사실 좀 절망했다. 아무리 공공기관이라고는 하나 비서 업무 자체를 스스로도 조금은 쉽게 생각했었는지 이렇게까지 많이 면접을 본다고? 하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코로나가 진짜 무섭긴 하구나, 나 취업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면접에 임했다. 면접을 보면서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 있자니 내 경험과 경력들이 보잘것없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는 가장 중앙에 앉았고, 바로 앞이 위원장님이었다. 모든 질문을 11명이 다 대답하고 넘어가니 먼저 대답하는 사람이 눈에 띄기 좋고, 나중에 대답하는 사람이 앞사람의 대답을 참고할 수 있어서 대답하기엔 수월했다. 하지만 나중에 대답할수록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가지 질문 외에는 2~3번째로 대답을 했다. 마지막 질문이자 첫 번째로 손을 들고 대답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사실 앞에 앉아있던 위원장님이 다들 손을 들지 않고 있자 눈짓으로 네가 해, 라고 신호를 주셨다, 정리가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시작했다.)     


 질문은 ‘업무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인지, 또 어떤 사고방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보라’ 였다. 나는 제약회사 품질보증부에서 불만 처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겪은 일이 가장 힘들었노라 답했다. 가장 중요한 사고방식은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는 것.     


 힘들었던 경험은 이러했다. 이물 관련 불만이었고, 1차 보고에서는 기계 윤활유의 산화로 인한 검은 물질이라고 결론지었던 건이었다. 하지만 1차 보고를 받은 회사 측에서는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고, 예산 상으로도 시스템상으로도 더 이상의 조사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어서 힘들었음을 얘기했다. 당시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문제 해결 능력’임을 꼽았다. 그 당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은 흥분한 상대를 진정시키고, 경청하는 스타벅스의 ‘라떼 법칙’이었다. 일단은 보고서를 작성함에 미흡할 수 있었던 부분을 인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보통의 불만 처리 기한은 일주일 정도로 잡지만 추가 피드백을 기한을 정해서 (당시에는 바로 다음 날로 말씀드렸다.). 감정을 진정시키고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이거였다. 불만을 제기한 회사에서도 같은 불만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왔으나 식약처 감사가 나와서 어떤 물질인지 밝혀내야 하는 상황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회사의 대응 방식에 ‘성의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데 이렇게 넘어간다고?’ 라는 감정적인 생각을 하게끔 했던 듯하다.  

   

 결론은 사실 똑같았다. 더 해결할 방법은 없었지만 차분하게 설명했던 결과 감정적인 대응을 중재하고 처리 방법에 대한 강한 반발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는 불만을 제기한 회사처럼 연구소가 따로 있지 않았고, 정확한 물질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부분의 한계를 인정해주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직접 겪은 경험들을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디테일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고, 그게 가장 큰 합격 사유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실제로 면접에 참석했던 관리직이 본인이 이 면접에 참여했으면 떨어졌을 것이라고 말해서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가장 힘들었던 경험과 그것에서 벗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평소에 생각을 정리해놓지 않으면 바로 나오기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업무 능력을 어필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합격한 비서 업무였지만 오래 일할 생각은 없었다. 일반 행정으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아가는 과정 중에서도 쉴 새 없이 자격증을 준비했다. 재작년에는 컴활 2급의 실기를 땄고, 내일 배움 카드로 전산회계(2급, 1급), FAT(2급, 1급)의 수업을 퇴근하고 3시간씩 듣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토익 점수도 갱신해놨다.      

 현실적인 경력을 준비하면서도 평생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나가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내 중고등학교 장래희망은 항상 ‘교사’였다. 사범대는 가지 못했으나 생명공학과에 입학해서 교직 이수를 했다. 생물 교과로 정교사 2급 자격을 받고 졸업했다. 사실 정말 되고 싶었던 건 국어 교사였지만, 누군가를 가르쳐주고 성장시켜주는 것에 인생 최대의 가치 부여를 하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아픈 와중에도, 나아가는 와중에도 놓지 못했던 것 같다. 작년에는 그래서 ‘청춘학교’라는 곳에 문을 두드렸다. 학업에 정진해야 할 시기를 놓친 어르신들이 배움의 열정을 갖고 찾아오는 곳이다. 나는 중등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두 분을 가르치게 되었다. 새벽부터 장사하러 나갔다가 퇴근하자마자 3시간을 쭉 공부해야 하는데도 나보다 더 눈빛이 반짝거리고 열정이 넘치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시에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닐까, 이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안 좋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 변화를 이끌어 낼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삶 전반에 무기력이 깔렸었는데, 무심코 낸 용기가 이럴 때 빛을 발했던 것 같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혼자 스터디카페에 회의실을 빌렸다. 넓은 화이트보드 앞에서 다시 공부해가면서 가르칠 부분을 준비했다. 열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럴 때야말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교학 상장’이라는 단어가 실현되는 것.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그게 무엇이 되었건 가르쳐주고 선한 영향력을 전달해주는 것. 그 일을 멈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오히려 그 사람들 덕분에 배우는 점이 많다는 점이었다.  

   




 최근에 이런 이야길 들었다. ‘정신병은 두더지 게임 같아, 내려간 듯하면 고개를 쳐들지. 나는 각고의 노력으로 또 그 두더지를 방망이로 내리쳐야 해. 한 놈을 두드려 내리찧으면 다른 놈이 고개를 들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이런 생각들은 학습된 무기력을 강화시키는 꼴이 된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나임을 안다. 힘들고 괴로운 것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글을 써보자 생각했다. 그래야 내가 극복하기 위해 하고 있는 일들이나 성과에 대해서도 힘이 실리니까. 지금 겪고 있는 것보다 더 처절하게 망가진 순간에도 내가 해내 왔던 일들에 대한 복기가 가능해지니까. 에너지가 없어지면 그걸 해냈던 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고, 더 이상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준 계기와 변화 시점이 어디쯤인지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이 또한 ‘두더지 게임’같다. 두더지는 언제 치고 올라올지 예상할 수가 없다. 비슷한 사이클이지만 상황이나 원인은 매번 다르므로, 그때그때 취하는 나의 태도나 변화에 대한 시도가 달라진다. 처음 고개를 든 두더지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보았다. 앞으로는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든 두더지들에 대해 설명해볼 생각이다. 또 어떻게 동시에 그 두더지들을 잠재웠는지도 풀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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